80년대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격동」이라는 단어 하나에 80년대를 짐지우기에는 역부족이다. 70년대가 혼돈과 진통 속에서 성장해온 시대였다면 그 성장의 반복 속에서 실패와 좌절, 그리고 새로운 도전은 80년대의 몫이였다. 유보된 민주화를 지향하고 구각을 벗으려는 몸부림 속에 크고 작은 상처와 상흔을 남겼지만 80년대는 분명 새 시대를 향해 새 걸음을 내딛는 분수령이었다. 세계정서와 한국적 상황 그리고 한국교회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현실을 바로보기 위해선 지나온 10년을 되돌아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반성 없는 회고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85년, 신자 2백만을 돌파한 후 이제 3백만을 눈앞에 두고 있는 한국교회의 80년대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가. 격동의 80년대 한국천주교회의「교세」와 성장을 필두로 교회와「사회참여」, 「나눔」, 「문화」등 각 부분과「총론」을 포함 5회로 나누어 교회의 발자취를 살펴 보기로 한다. 어제와 오늘을 직시하는 토대위에서 내일, 90년대를 보다 현명하게 맞을수 있기 때문이다. <편집자註>
80년대 마지막 달력 1장을 남긴 현재 세계는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베를린 장벽이 사실상 무너지는 기적(?)속에서 동구권 제 나라들은 변신을 향해 어제도, 오늘도 진통을 거듭하고 있다. 80년「5.18광주 민주화항쟁」의 앙금이 10여 년간 이어지면서 이 땅 최대의 정치이슈로 남아있는 가운데 한국은 정치ㆍ사회ㆍ경제적 혼돈을 거듭, 90년대 유산으로 물려주게 됐다. 문규현 신부의 파북사건으로 3명의 사제가 구속되는 아픔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80년대를 마무리하는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뤄냈다.
80년대의 한국교회는 급변하는 정치ㆍ사회상황 속에서 그 모습을 읽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80년대 벽두에 터진 5.18광주 민주화운동, 제5공화국 탄생, 버마 아웅산 사건, KAL기 피격 및 폭파사건, 4.13호헌, 범국민적 민주화운동, 6.29선언, 제6공화국 출범 등등 무수한 사건과 사태가 속출하는 와중에서 교회의 몫도 그만큼 큰 비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정치ㆍ사회적분위기 속에서 80년대의 한국교회는 외형적 성장이라는 호황을 누렸다고 할 수 있다. 그 외형적성장의 현상을 교회 스스로 볼 수 있었던 기회는 한국교회가 세 번에 걸쳐 치러 낸 대규모 행사들이었다.
81년, 조선교구 설정 1백50주년기념 신앙대회, 84년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 기념행사와 1백3위의 한국성인 탄생, 그리고 얼마 전 개최된 바 있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 등은 교회가 새로운 모습의 자신을 확인하면서 자부심을 갖는 하나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두 번에 걸친 교황의 방한 역시 한국교회의 이 같은 자부심과 자신감을 강력히 뒷받침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80년대 교회 3대 행사로 규정될 이들 행사는 거대해진 자신의 외모를 확인시켜준 반면 이면에 묻힌 문제점들을 표출시켜 주었다. 「외화내빈」이 그것이었다. 「외화내빈」은 결국 90년대 교회가 풀어야할 숙제로 남겨지게 된 것이다.
80년대 교회는 2명의 보좌주교를 포함, 5명의 주교를 탄생시켰고 각 2명씩의 대주교ㆍ주교를 잃었다. 82년 박정일 주교, 84년 김창렬 주교, 85년 김옥균 주교, 86년 강우일 주교에 이어 올해 첫 군종단 담당 정명조 주교가 탄생, 교회성장에 부응하는 뒷받침을 이루었다. 반면 84년 황민성 주교, 노기남 대주교, 87년 서정길 대주교, 88년 김재덕 주교가 서거 한국교회 기틀마련의 큰 기둥들을 잃는 아쉬움을 남겼다.
80년대를 열면서 한국교회는 1백25만 명의 신자를 확보하고 있었다. 중반까지 2백만을 넘기 힘들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85년 말 전체 신자 수는 2백만 고지를 무난히 넘어섰다. 교회창설이후 1백90년이 지나도록 1백만 신자에 머물러있던 한국교회가 불과 10여년 사이에 배가된 교세를 확보할 수 있었던 상황에 대해 사람들은「비상정국」이라고 표현되는 사회현실들과 유관하다는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사회적 상황과 유관하든 무관하든 한국교회 신자 수는 89년말현재 2백60만을 무난히 넘어설 전망이다.
한국교회와 교세
89년 말 예상되는 2백60만의 신자 수는 전체인구수에 대비한 신장율로 따지자면 6%에 못 미치는 수치. 지나치게 미미한 수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2백년 한국교회 역사 중에서 10년만을 잘라낸 신장율로 본다면 대단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교회는 1백90년간의 증가폭을 그대로 따라잡은 셈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80년대 한국교회 신자증가율이 사회정치의 제 현상 및 교회의 역할 등과 유관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제 그 같은 호황기는 지났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지난 80년대와 같은 격변과 변화가 재현돼서도 안 되겠지만 재현될 수도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국 신자의 자연증가에 대한 기대감을 일찌감치 떨쳐버리고 교회는 지상최대 사명인 「선교」를 최우선에 두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신자들의 전교의지에 따라 신자증가율이 크게 달라지는 현상은「이웃전교의 해」였던 81년과 그 다음해인 82년의 신자증가율이 입증해 주고 있다. 연3~5%선에 머물러있던 신자증가율이 81년과 82년에 8~9%선을 육박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서울ㆍ광주로 대별되던 대신학교가 대구ㆍ수원 등 4대신학교로 늘어났고 현재 대전ㆍ부산 등지에서 대신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현실도 한국교회 신장을 읽게 해주는 징표가 아닐 수 없다. 현재 추세로 라면 한국교회는 머지않아 모든 교구에 대신학교가 설립될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하게 됐다.
평신도단체들의 급증은 괄목할만한 80년대의 현상. 꾸르실료, MㆍE, MBW, 성령쇄신운동 등 신심운동차원의 단체들이 탄생하고 성장한 70년대에 이어 80년대는 전문성과 개성을 갖춘 평신도단체들이 대거 등장하는 평신도단체의 춘추전국시대였다.
평신도단체의 대표격인 평협을 비롯, 여성연, JOC, 언론인회, 실업인회, 병원협회, 농민회 등으로 구성되던 평신도단체들은 사진가협회, 운전기사도회, 세무사회, 인쇄인회, 의류협회 등등 각 부문별로 확산되었다. 평신도단체 증가는 교회「공인단체」와「비공인단체」로 뚜렷이 구분되면서 80년대 교회가 직면했던 문제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80년대에 등장한 비공인단체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ㆍ천주교 사회운동협의회 등 모두 10여개가 등장했는데 이들 단체들은 격동의 80년대를 상징하는 부산물이자 한국교회의 사회참여부분의 광범위한 확산을 대변해 주고 있다.
한국교회와 사회참여
80년대 교회의 사회참여는 사회적 변동의 폭이 큰 그만큼 회오리를 몰아왔다. 80년, 이른바 5.18광주사건이라는 이 시대 최대 파문은 교회가 사회 속에 톤 높힌 목소리를 다시 내어놓는 기초가 되었다. 81년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강제로 잠재워진 광주문제는 87년 민주화과정에서 다시 분출, 오늘에 이르고 있다. 82년 미 문화원 방화사건과 관련, 실형을 선고받은 최기식 신부 사건으로 교회의 양심과 실정법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긴장정국을 연출한 이래 84년 2백주년을 전후로 공식적인 교회의 대 사회를 향한 목소리는 잠시 주춤했다.
82년 주교단은 인권주일을 제정, 첫 담화문을 발표한데 이어 계속되는 인권주일 메시지를 통해 공권력을 남용한 인권침해 사례를 규탄하는 등 인권문제에 대한 교회입장을 천명했다. 주교단은 85년 노동자·농민문제를 다룬 사회사목교서 「이 사회의 인간화를 위하여」를 발표, 교회의 사회정의에 대한 가르침을 환기시킨바있다.
경색된 정국 속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전모가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에 의해 밝혀지기 시작, 87년 새해 벽두부터 휘말린 박군 고문치사 사건은 4.13호헌발표에 이르기까지 이사회와 교회 전반을 뒤흔들어 놓았다. 사제단의 단식과 연일 이어지는 민주화 기원미사·기도회를 통해 교회는 4.13호헌이 국민적 항의에 대한 배반이라고 규정 호헌철폐와 인간의 기본권 문제를 거듭 제기했다.
6.29선언과 제6공화국이 출범하는 와중에서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가 다시 거론됐고 문규현 신부 파북사건은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 어느 때보다 상반된 견해가 맞부딪친 문 신부 사건은「선언적의미의 참여」와 「구체적인 참여활동」에 대한 논란으로 교회를 힘겹게 했다.
결국 70년대에 이어 풀지 못한 교회의 사회참여 한계문제는 80년대를 거쳐 90년대로 넘겨주는 숙제가 되고 말았다.
한국교회와 나눔
80년대 교회를 단순히 평한다면 나눔의 교회라 말할 수 있다. 80년대 초 50여개에 불과하던 전국 교회의 사회복지 시설이 크게 상회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눔의 교회라는 말을 현실감 있게 해주고 있다.
아동복지를 비롯 여성복지·가정·청소년복지·장애자복지·행려자복지·의료복지 및 상담기관으로 구분되는 각종 복지시설들은 나누는 교회로서, 한국교회를 대변해 주는데 있어 손색이 없다 하겠다.
더욱이 80년 아동복지협의회결성에 이어 85년 장애자복지협의회, 86년 교회빈민의료협의회, 가톨릭 사회복지협의회, 87년 무의탁복지협의회 등이 차례로 결성돼 교회의 복지활동은 체계적인 틀과 모양을 갖추게 됐다. 이중에서도 행려자복지 종합시설「꽃동네」의 급성장은 장애자 복지 분야의 증가와 더불어 괄목할 만한 성장으로 지적되고 있다. 나눔의 차원을 서울에 국한시킨다면 놀라운 발전이지만 교회전체의 의식변화와 각 지역교회들의 나눔 의지는 아직 미약한 편. 시설복지가 나눔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볼 때 본당과 교구차원에서 전문성과 개성을 살린 나눔 활동을 보다 발전적으로 실천해 나가야 한다는 얘기다.
풍족할 때 남는 것을 나누는 것은 진정한 나눔이 아니라고 한다. 만일 풍족하기를 기다렸다면 우리교회는 아직도 외방선교를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81년 파푸아뉴기니로 4명의 사제를 파견하는 것으로 시작된 외방선교는 이제 1백16명의 한국인선교사를 세계32개국에 파견할 만큼 성장했다.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의 탈바꿈」은 외방선교를 통해 첫결실을 얻은 셈이다. 한국교회가 진정 나눔의 신비를 깨닫고 있다면「부유한 교회」「가난한 이들에게 닫힌 교회」라는 부분적 호칭을 90년대에까지 넘겨주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와 제문화
광범위한 의미에서 문화를 얘기한다면 80년대 교회의 문화적 활동은 풍성하다 하겠다.
70년대 교회가 신·구약 공동성서번역과 교회서적들의 출판이라는 빈곤한 문화 활동에 그친 반면 80년대 교회는「통일성가집」「가톨릭대사전」발간을 필두로 교구사ㆍ본당사ㆍ수도회사ㆍ기관단체사 등이 잇따라 발간되는, 문화적 호황을 누렸다.
한국 가톨릭문화 전반을 집대성, 문화의 복음화·복음의 토착화라는 문제에 한걸음 크게 다가서게 할「한국 가톨릭문화사대계」는 6개년 계획으로 작업 중에 있다. 지난10년 간 쏟아져 나온 서적류도 70년대에 비해 크게 늘었고 생활성서ㆍ성서와 함께ㆍ빛ㆍ가톨릭 다이제스트 등 교회월간지를 비롯, 평화방송·신문이 출현, 분출하는 문화적 욕구충족에 일조를 담당했다.
종교음악연구소를 비롯, 가톨릭문화연구원ㆍ문화 선양회ㆍ성지연구원등 가톨릭문화의 확산을 통해 문화의 복음화를 겨냥하는 단체들의 탄생 역시 80년대의 왕성한 문화의식을 대변해 준다 하겠다.
한국말 교회법전의 발간, 한국교회 지침서 발간도 80년대 교회 문화 활동의 결실. 84년 2백주년과 89년 세계성체대회를 전후로 베풀어진 각종음악회·미술전·공연들은 문화에 관한한 어쩌면 불모지라고 여겨질 교회 안에 가톨릭 문화에 대한 인식의 폭을 크게 확산시켜준 계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교세신장과 나눔 분야 등과 비교해볼 때 교회의 문화부문은 여전히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양적팽창을 거듭하면서도 내적으로는 충실치 못하다는 이야기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 되어져야할 것이다.
내적빈곤을 채우기 위한 방법 중 문화적 활동에 대한 이해와 지원을 상당히 중요하다. 문화·예술 각 분야에 걸쳐 교회의 지원이 따른다면 한국 교회는 문화라는 거대한 매체를 통해 이 땅에 더욱 공고히 뿌리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