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6일은 안중근(토마) 의사의 60주기다. 온겨레는 물론이요 특히 한국가톨릭이 안 의사를 깊이 추모할만한 뜻 깊은 때를 당하여 안 의사와는 깊은 인연이 있는 한 외국인 신부의 유족과 안 의사의 후예 사이의 서신교류로 인해 구라파로 망명후 생사를 몰랐던 안 의사의 종형제 한 분의 소식이 50년만에 밝혀졌다.
홍 신부(佛人ㆍ빌헤름)는 안 의사가 여순감옥서 처형될 당시 그에게 마지막 고해와 종부를 준 신부이다. 현재 한국일보에 연지중인 안의사 옥중자전에 의하면 당시 안 의사는 홍 신부와 의논하고 한국에 대학을 세워 영준자제를 길러 장차 한국 자주독립의 기틀을 튼튼히 하려 했으나 민 주교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안중근 의사와의 관련으로 끝내 본국으로 소환되어 시골본당으로만 전전하다 쓸쓸한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난 1월 홍 신부의 생질녀인 빗트만 부인(73세)에게서부터 안 의사의 4촌 안봉근(요한)씨의 셋째아들 안민생씨에게 전해진 소식에 의하면 안봉근씨는 2차대전후 홍 신부를 따라 불란서에 와서 홍 신부 누이 집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후「베르린」에 가서 살다가 해방후 조국에 돌아오던 도중 이태리「나포리」에서 병사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전했다.
안봉근씨가 홍 신부를 따라 불란서로 망명할 당시 고향엔 부인과 아들 3형제가 있었다. 그는 다시 1차대전 종전후 잠시 고국에 들렀으나 일인의 박해로 다시 불란서로 망명, 이때는 청개동에 있던 안씨집안 80여 가족은 왜적의 박해를피해 북간도 서간도 러시아 상해 구라파로 산지사방 뿔뿔이 흩어져갔다.
현재 대구시 대봉동 일우에서 부인과 3남매의 가장인 라우렌시오 민생씨는 병석에 누운 몸으로 옛날을 회고하여 안씨집안의 장정은 망명후에도 항일투쟁에 가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형과 형수는 왜적에게 총살당했고 자신은 이미 18세부터 옥고를 겪었고 독립단에 들어가 만주국민병 혹은 관동군과 무수히 접전 총상을 입었고 20년간 중국 각지를 전전하다 해방후 조국에 돌아왔다고 했다. 그후 안민생씨 어릴적에 헤어져 생사조차 알 길 없는 아버지를 찾아 수소문해 오다가 작년 한국일보「빠리」특파원 정종식 기자에게 의뢰했던바 우연히 현재「스트라스불그」에 있는 홍 신부의 생질녀 빗트만 여사와 교신하게 되었다. 빗트만 여사는 생전의 홍 신부로부터 한국과 안 의사 집안의 이야기를 듣고 또 요한 안봉근씨와는 형제처럼 지냈던터라 그의 후손들에 대해선 무척 궁금히 여기던중 안민생씨의 편지를 받고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이런 편지를 보냈다.
『50년의 침묵후 우리들의 친구 안봉근 요한의 한 아들로부터 한장의 편지를 받은 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그렇게 헌신적인 당신의 아버지가 우리집에 있었던 시절을 잊지 않습니다. 우리 아저씨는(홍신부) 항상 그의 사랑하는 한국에 대해 그리고 용감한 국민에 대한 정을 우리에게 이야기했읍니다. 그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당신을 영세준 것도 바로 그분입니다….당신이 중국에서 지낸 20년간 친애하는 라우렌시오! 어떻게 지냈읍니까? 거기서 숨어있었읍니까? 감금돼 있었읍니까? 나는 중공인들이 당신을 모택동 주의자로 개종시키는데 성공하였으리라고는 믿지않고 싶습니다. 요한의 한 아들이 그렇게 될 수는 없읍니다….』
빗트만 부인은 봉근씨가 남기고 간 가족 사진과 그가 부인에게 증정한 한국을 소개한 책자를 두 차례의 전쟁속에도 간직하고 있는데 라우렌시오씨가 원한다면 우송하겠다고 하며 어린 3형제의 사진 2장은 이미 송부되어왔다.
부인의 편지에 의하면 안봉근씨는 그후 독일「베르린」에 가서 살았는데「베르린」올림픽 당시 손기정 선수에게 비밀히 태극기를 보여주면서 부디 조국을잊지 말라는 격려를 받았다는 손기정씨의 회고담이 모잡지에 실린 적도 있다.
안씨집안의 보다 구체적인 수난과 투쟁경력이 나 자신의 내력을 굳이 밝히려 하지않는 안민생씨는 이제 꿈에도 잊을 길 없던 아버지의 생사를 알았으니 다행이나 필생을 조국광복과 항일에 몸바친 선조들에 대해서 아직도 조국은 분단상태고 보니 무슨 면목이 있으며 이제 한일수교조약이 이루어지니 세태의 무상함에 자못 착잡한 사회를 가눌 길이 없어했다. 26일은 안의사의 60주기, 초창기 한국가톨릭의 선구적이고도 개척자로서의 공적이 큰 안씨일족, 그리고 근대문명의 영향을 받아 조국광복의 횃불을 든 안의사를 위해 해마다 명동성당에서 어떤 사제 한 분이 미사 한 대를 드리고 있는 모양인데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노라고 셋집 단칸방에서 안민생씨는 병석의 몸을 가누면서 숙연해했다. (D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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