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상 수인(囚人)으로서 편지를 써서 후세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그리 많지않을 것이다. 얼핏 사도 성 바오로,「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리옹」「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리옹」교회의 순교자들, 15세기말 이태리「플로렌스」의 도미니꼬 회원 사보나롤라, 그리고 우리 한국교회의 김대건 신부님을 연상할 수 있으리라.
본회퍼를 존경하는 이들중에는 그의 사후 출판된 그의 수인 서한집「반항과 항복」을 읽고 그의 사람됨과 사상을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들이 적지않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본회퍼는 본의는 아니겠지만 수인으로서 이름을 남긴 많지않은 사람들중에 속한다. 이 사실은 벌써 그의 비범함을 암시해 주는 듯하다. 과연 그의 수인 서한집을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그의 침착과 용기, 비정에 가까운 그의 냉정, 특수한 동기에서 영어의 몸이 된 그의 특수한 개인적 경험을 보편적 언어로 옮길 수 있었던 그의 뛰어난 지성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완강하고 철두철미한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신앙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수년동안 교파를 초월하여 그리스도교 신학계에 그가 각광을 받고 나타날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독창적 신학사상뿐만 아니라 이러한 그의 인격의 매력에도 많이 힘입고 있을 것이다. 그는 과연 어떤사 람이었던가? 사신론(死神論)의 물결이 휩쓸고 간 이제서야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좀 쑥스럽기까지하다. 그런대로 그의 생애의 어떤 뜻을 판독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보면서 그의 양력을 살펴보기로 하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1906년 2월 4일 독일(지금은 동독)「브레슬라우」에서 그의 누이와 함께 쌍둥이로 태여났다. 그의 가문은 독일 프로테스탄티즘에서도 가장 우수한 전통을 이어오는 조금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의 부친 칼 프리트리히는 의사로서「베를린」읫과대학의 정신과 및 신경과 교수였으며, 그의 모친 파울라 폰 하세는 한동안 윌헬름 2세의 궁정(宮庭)목사였던 칼 알프레드 폰 하세의 딸이었고 외증조는 교회사와 교의사(敎義史)의 대가로 유명했던 칼 아우구스트 폰 하세이다.
본회퍼 일가는 1912년에「베를린」에 이사한 다음, 그곳의「그뤼네발트」고급주택 지대에서, 20세기 전반기 최대의 교회사가요 교부학자인 아돌프 폰 하르낙과 같은 석학들과 한 이웃에서 살았다. 이와같은 상류사회에서 자라온 본회퍼에게서 가끔 귀족풍의 기질이나 사고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하겠다. 프랑스 예수회원 러네 마를레 신부가 그의 저서「디트리히 본회퍼」첫 머리에 그를 하나의「귀족」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1923년 본회퍼는 그의 나이 16세때에 신학을 전공하기로 결심 그의 가족들과 친지들을 약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그런대로 그의 첫학기를「류빙겐」에서 시작하였다. 그는 거기서 하이트물러 특히 슐랏터 같은 성서주석의 대가들 그리고 조직신학을 위해서는 하임 교수 밑에서 사사하였다. 그 이듬해 여름학기부터는「베를린」으로 전학하여 그곳에서 하르낙 그리고 다이쓰만, 릿츠만 같은 쟁쟁한 대가들의 청강생이라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당시「베를린」신학대학의 교리신학강좌는 금세기 루터연구 부흥에 크게 이바지한 홀과 세에베르그였다.
1927년 12월 7일 본회퍼는 이 세에베르그 교수의 지도 밑에「성도(聖徒)들의 교환(交歡)」(일명「신자들의 공동생활」)이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얻었다. 그의 나이 겨우 19세. 그 이듬해에는 서반아의「바르 셀로나」에 가서 그곳 독일인교회의 부목사로 일년간종사 1929년「베를린」에 돌아와서는 1930년까지 뤼트게르트 교수의 조교로 활약했다. 1930년 7월 8일에는 미국에 건너가 뉴욕의 연합신학교에서 일년간 연구생활, 여기에서 그는 미국사회를 처음으로 경험하고 인종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특히 미국형 프로테스탄티즘을 처음으로 알게된다.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되고 이들은 그의 길지않는 생애에 다소간의 영향을 주게된다. 1931년 귀국하여 7월에는 3주일동안「본」시에가 있으면서 당시 그곳에있 었던 칼 발트와 처음으로 친교를 맺는다.
본회퍼는 발트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을 방문하고 그와 단둘이서 신학토론을 나눈다음『정작 발트는 그의 저서들보다도 훨씬더 초연해있다. 나는 그와의 토론에서 그의 저서가 강의에서 보다도 더 큰 인상을 받았다』고 자기친구에게 술회하고 있다.
8월 1일부터는 대학강사로서 강의활동을 시작, 같은해 11월 15일에는 목사로서의 안수례를 받는다. 이해부터 그는 교회일치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게된다. 1933년(3월 1일)에는「지도자 개념의 변천」이라는 제목으로 그때 벌써 집권하고 있었던 나치정권을 비판하는 래디오 방송 강연을 하면서 지도자는 유괴자가 될 수 있다고 혹평, 이 방송은 중단되었다.
이해 여름에는 나치의 어용교회였던 세칭『독일 그리스도교인』을 거부하고 후에「고백교회」라고 불리게될 반 나치운동이 교회내에 싹트기시작한다.
이 운동은 1934년「바르멘」과「다알렘」의 총회에서 그 교리적 기초를 얻게 된다.
그러나 본회퍼는 1933 년10월에「런던」에 건너가 거기서 독일인 교회를 맡는다. 이때 칼 발트와의 의견충돌 이있은 다음 한동안 둘 의사이는 소원해진다. 본회퍼는 발트의 귀국 권고에 도불구하고 1935년 봄까지 그곳「런던」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동안에도 그는 각종 교회일치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영국체류와 교회일치운동의 부산물로 서그는「치체타」의 주교 벨과 친교를 맺게되었다. 이 벨 주교는 후에 본회퍼도 가담하게 될 히틀러 암살음모의 거사를 위해 직접 간접으로 그를 도와주게됐다.「런던」에서 귀국한 후 본회퍼는 곧「발틱」해안에 있는「찡스트호프」에서 고백교회의 신학교 창설에 그 운영의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이 신학교는 당시의 물질적 악조건으로해서 두 달후에「슈텟틴」근처에 있는「핑켄발데」라는 곳으로 옮아가야 했다. (이 신학교는1937년 히틀러에 의해 페교될 때까지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 본회퍼는 이 해 가을 일종의 수도원과도 같은「형제들의 집」창설을 교회당국에 신청하여 허락을 얻은 다음 학생들과 함께 공동으로 기구하고 연락하며 형제적 충고를 주고 받고, 어떤 때는 죄의 고백도 하고 성만찬을 거행하면서 이 공동체를 이끌어갔다. 이때의 명상의 결실로서 그는「공동생활」과「주님의 뒤를 따름」이라는 두 저서를 1937년과 38년에 각각 출판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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