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한국인 각 개인이 보다 충실한 복음의 생활을 할 때 그리고 많은 신부가 그렇게 살았을 때 한국에서 참답게 복음에 따르는 또 참된 한국인의 사제생활이 이루어질 때 사제 생활의 토착화는 가능한 것이다.
사제 생활은 다른 직업인의 생활과는 다른 것이다. 기술자는 자기 개인의 생활 전체와 상관없이 몇시간의 기술을 쓸 수 있고 그 직업에 종사할 수 있으나 신부는 신부 그 개인의 생활 자체가 모두 신부의 하는 일에 속하는 것이다. 신부는 자기 생활전체를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다는 것은 독신 생활에서 꽃을 피우고 사람들은 모든 것을 바친 사제의 수도 생활에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불승의 독신생활과 뜻은 다르나 사제의 독신생활을 사람들은 쉽게 긍정하고 또 사제생활의 거룩한 일면을 사람들은 인식한다. 그러나신부에게는 어쩐지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아집이 강하며 자기완성에 매력을 느끼는 동양적인 인간의 노력에 비해 한국의 신부생활은 자기완성을 위한, 자기의 전생활을 통한 종교적인 수양의 노력이 부족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다.
물론 사제는 교회의 사업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으로 수사들과는 다른것임을 충분히 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신부는 으뜸가는 종교인이고 종교인은 적어도 자기 수양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불교의 스님은 수도하는 사람으로 쉽게 생각한다. 신도들과 불공을 드리고 하는 일들이 오히려 부수적인 것 같이 보일정도이다. 목회를하는 목사님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느님의 말씀을따라 살기를 노력하며 신도들의 기도를 인도하는, 설교하고 기도하는 사람인 것이다. 신부는 설교하고 기도하는 것보다 성사의 집행인으로 더 뚜렷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성사의 집행인임을 너무 강조하면 신부는 성사 주는 기계이고 사제 생활은 기술자와 같은 직업인 생활로 전락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사제의 본성에 어긋날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특히 기대하는 생활 전체가 바쳐지는 또 종교가로서 겸손되이 수양하는 생활이 되기를 바라는 한국인의 사제관에 맞을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신부는 신권을 대행하는 사람으로서 권위를 가지나 그 권위는 충실된 사제생활을 내포할뿐 자기생활의 허점을 은폐하는 장막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자기 스스로는 열외의 존재인양 착각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 말 것이며 신부는 하느님의 나라의 치자(治者)의 대열에 속하고 피치자가 아닌 것 같은 생각과 함께 신도들을 다스리는 소군주적인 것이 사제 생활 가운데 발견되도록 하지 말야야 할 것이다. 로만 칼라에, 라띤어 기도문제, 서양식 생활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사제를 그렇게 잘 상징하는 로만 칼라만 보더라도 우리는 진정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로만 칼라없이도 분명히 사제생활은 있었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한복차림을 우리는 안다. 옷이 중을 만들지 못한다는데 신부가 제복을 벗고 생활로 사제됨을 보여줄 수는 없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로만 칼라를 벗으면 신부 아닌것 같이 생각하고 로만 칼라에 온 신경을 다 쓰는 것인가. 확실히 로만 칼라는 서양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받아들인 모방이다. 모방은 속이 비었을 때, 독자적인 창의력이 없을 때 있는 일이다. 옷이 문제가 아니라 참다운 기독교 정신으로 살면 그만인데 아직 그 정신마저 일종의 모방을 넘지 못하는 것이다.
신부의 머리에 아직도 구체화하지 못한 서양의 개념들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전연 틀린 말일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은 구체적인 것이다. 어부와 베드로와 미천한 자들이 알아듣던 진리인 것이다. 생활을 통해 보고 느끼고 손가락을 넣어보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복음을 사람들에게 알아 듣도록 이야기할 신부가 얼마나 되며 또 신자들과기도한번 바칠 수 있는 말이 어느 신부 입에서 쉽게 나오는가. 그래도 신부는 라띤어로 성경을 읊고 머리안에는 번역된 서양말과 아니면 서양말 그대로 남아있고 혹은 아직도 서양말로 신학공부를 해야하는가.
토착화는 반드시 한국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것을 기독교화하는 또 하나의 방향도 있는 것이다.
신부는 도포를 입고 서양말은 몰라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어느학자 모양양(羊) 대신 범(虎)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토착화에 역행하는 것이다. 정신이 외모를 갖추도록 해야할 뿐이다. 있는 가치는 긍정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이미 한국적인 것에 다시 가치를 주고 기독교화하는 일을 소홀히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를들면 사제는 예회를 모르고 말버릇이 나쁘다고 하면 그것은 한국인이 가진 한국적 미덕을 무시한 소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살지 아니하고 그들과 같이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같이 살기 위해서는 생활을 훨씬 더 개방해야 할 것이다.
보다 적극적인 생활이 교류되는 사회 가운데서의 소탈하고 개방된 사제생활이 있어야 빨리 토착화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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