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에게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것 이있었다。그 하나는 신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끊임없이 에워싸고 몰아세우는 상황-이것이 반드시 그리고 항상 극한 상황이어야 할 법은 없다。-이다。이 상황를 정시할 때 우리는 비로소 저 구약의 성조 야곱과 함께 고백할 수 있으리라。『주께서는 정작 이 자리에 계시는데 나는 그것을 몰랐었노라』고。(창세기 28ㆍ16 참조)
그러니까 본회퍼는 1939년 6월에 도미하였다가 같은해 7월 27일에는 다시「베를린」에돌아왔다。이때부터 1943년 4월 5일 그가 체포될 때까지 3년반 동안 본회퍼는 여러가지 제한과 악조건을 무릅쓰고 국내외를 여행하면서 반「나치」운동을 줄기차게 계속한다。1941년과 1942년 사이에 그는 스위스에 세번, 노르웨이와 스웨덴에 각각 한번씩 여행하면서 당시「나치」군을 거슬러 싸우던 연합군ㅡ 특히 인근인 영국의 지원을 청하면서 힛틀러의 암살음모를 추진하였다。1943년 1월 17일 본회퍼는 당시 18세 처녀였던 마리아 풀 웨데마이어와 약혼한다。이해 3월 13일과 21일 두 차례에 걸쳐 히틀러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폭탄불발, 혹은 시간의 계산착오로 두번 다 수포로 돌아갔다。드디어 4월 5일 본회퍼는 가택수색 끝에 체포되어「레겔」군사형무소에 수감된다。
10월초에는 탈옥계획까지 하였으나 그의 형 클라우스를 비롯한 여러 친척과 인척들이 한꺼번에 피체되자 일가의 멸망이 두려워 이 탈옥계획은 포기하고 말았다。10월 8일 그는「프린츠ㆍ알브택호트」가에 있던「게슈타포」감옥으로 이감, 1945년 2월 7일에는『복헨발트』의 강제집단 수용소로 거기에서 다시「레겐스불그」「쇤베르그」「풀롯센뷔르그」로 차례로 이감되었다。
그해「예수부활」후 첫주일이엇다。같은 감방에 있던 동료 수인들-그들은 모두 정치범들이었다-이 본회퍼에게 그 주일예배를 주례하여 주기를 청탁하였다。그는 이 동료 수인들이 대부분 가톨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거기에 있었던 소련 국적을 갖고 있는 어떤 맑스주의자와의 우정을 생각해서 처음에는 사양하였다。그러나 그들의 간절한 청탁을 물리칠 수 없어 소련청년의 양해까지 얻고나서 그 주일의 예배를 주례하였다。예배가 끝나자 옆방에 있었던 다른 수감자들이 자기네를 위해서도 예배를 주례해달라고 간청하면서 본회퍼를 그들의 감방으로 몰래 데려오려고 일을 꾸미고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어떤 민간인 두사람이 감방문을 차고 들어와서『수감자 본회퍼 준비해가지고 따라와!』하고 소리치는 것이 었다。본회퍼는 모든 것을 각오하고 소지품몇가지를 서둘러 챙겼다。그는 늘지니고 다니던 풀루타크의「영웅전」앞뒤 한가운데에다 자기 주소와 이름을 적어 감방에 남겨놓고 영국군 장교포로로서 한 감방에 있었던 베스트에게는「치체스타」의 벨 주교에게 문안을 부탁하였다。감방을 나가면서 본회퍼가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은『이제는 마지막이다。그러나 내게는 새 생명의 시작이다』그 이튿날 1945년 4월 9일 그는 교수형을 받고 죽어 있었다。그의 나이 39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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