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인식과 영신생활>
지난 공의회 제1백37차 총회에서 제13헌장 초안을 심의할 때 멕시코「쿠에르나바까」의 멘데스 주교는 정신분석에 대해 무관심해서는 안된다고 호소했다。
동주교는 오늘날의 인간을 전교하기 위해서는 절대자인 신과 마주 대했을 때의 인간의 정체와 신분을 알아야한다고 일깨웠다。
이제 정신분석은 지식을 발전시키는 인간문화의 일부를 형성했고 또 인간에 대한 개념을 새로이 해준다。
멘데스 주교는 정신분석이 아직 원숙하지 못한 학문이며 위험이 따르는것도 사실이라고 인정했다。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특히 사목에서 인간에대한 지식의 공급원을 외면해 버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믿을만한 분석의를 잘 이용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정신분석은 인간을 도울 수 있는 순수화시키는 성질을 드러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은 흔히 그것을 막거나 빗나가게하는 심리적 성향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멘데스 주교의 교구에있는「성모승천」베네딕또회의르메르시에 원장은 수도회 내의 거의 모든 수사들에게 정신분석을 실시하여 그로인해 수명의 수사가 수도원을 떠나는 사태를 빚었다。후에 성청은 르메르시에 신부를 단죄했고 1967년 르메르시에 신부는 사제직을 떠나고 동수도원은 해체됐다。이 사건에 대해 성청 보도국은 동사건의 처벌이 르메르시에 신부 개인에게 한한 것이고 정신분석의 성질에 관해서는 판단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고 말했었다。르메르시에 신부는 그가 출판한 책에서 밝힌바와 같이 그 문제에 독특한 의견을 가졌던 듯하다。
그러나 신학자들뿐아니라 정신분석의까지도 동신부가 정신분석과 영신생활을 혼동한 나머지 정신분석을 남용했다는 의견이다。
교회가 너무 엄격했다는 비난도 없지 않다。그러나 교회는 정신분석의 잇점을 잘이용하는 건전한 사목신학을 단죄하지는 않는다。
고해신부나 영신지도자는 때로 정신분석적인 기술이 아니고서는 구제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 좋은 예는 동성애문제다. 이런 성벽을 가진 젊은 사람에게는 전문가가 불안을 감소시키고 교정해주는 정신의학의 일반적인 방법을 이용하면 된다。
이런 경우 호르몬요법은 확실하고 안전한 해결책이 못된다。그러니 정신분석적 요법밖에 없다。왜냐하면 정신작용에서 일어나는 요인들은 환자의 과거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과도한 애정이나 증오는 흔히 성욕도학에 기인한다。정신분석은 나중의 조화있는 성숙을 막은 어릴 때의 자기도취나 편견 불안을 발견ㆍ진단함으로써 치료한다。교회는 이러한 방향의 노력에는 결코 이의를 달지않았다。
<필요한 용기>
정신분석은 정신질환에 뿐만아니라 영신생활에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오디어 박사 같은 전문가가 17세기의 도덕가들-특히 라로습류꼬-을 기능적인 심리학의 선구자로 보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이들은 덕이 악을, 겸손이 교만을 겁이 야심을, 검소는 허영을 숨기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프란치스꼬 살베시오 나보쉬에, 혹은 메넬룽이 자기들의 영신지도를 받는사람들로 하여금 이 이중심리를 벗어나게 하기위해 얼마나 지독하게 노력했는가 또 그다음에 어떻게 소위 오늘날 불순한 동기나 무의식적 동기로 일어나는 피해를 인정하게 됐는가 하는 것은 그들의 서간집을 잘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이제는 덕행의 실천에까지도 정신분석이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1968년 모리스 벨레는 정신분석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사용하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말을 더 잘 이해하게 해준다고 주장했다。
신앙은 진리와 생명의관문이다。그러나 정신분석은-비록전혀 다른방법이고 또 극히 어려워보이는 극기를 통해서이지만-신앙이 예시하는 것을 이루어주지 않는가?다른 현대 영신작가들은 이「극기」라른 말을 적절히 이용된 정신분석의 결실을 일컫는데 사용한다。
앞서말한 수도원에서는 수사들이 그들 자신의 본 모습을 대면하기 위해 필요한 내적 진보를 거부했기 때문에 수도원을 떠나게 되었다고들 한다。누가 뭐라든 정신분석은 인간이 자신을 더 잘 보도록 해주고 환상을 없애주고 타협하려는 경향을 극복하도록 해주고 쉬운 탈출구를 마련해 주는 것은 사실이다。예를들면 받아들일 수 없는 동기를 정신분석은 똑똑히 드러낼 수 있다。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정신분석은 안이한 해결책만 제시하기는 커녕 대단히 요구하는 것이 많고 또 끝내는 순수한 신앙에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이유가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정신분석이 용기를 잃을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베르나노스는 때로 인간이 자기의 모습에 대해 묵상할 때 들여다보이는 것이 너무나 괴로운 것이어서 하느님께 그 거울을 깨뜨려달라고 호소할때가 있다고 말했다。그는 이 때문에 인간이 자신에 대해 모반하지 말고 하느님의 손길 속에서 온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왜냐하면 자기 혐오는 실망과 직통하기 때문이다。
건전한 정신분석은 이러한 자신의 상실을 가져오지 않는다。젝 도미니언 박사도 최근 이 점에 대해 강조했다。즉 현재와 다이나믹한 심리학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깊이 사랑하지 못하면 하느님도 이웃도 진실히 사랑할 수 없다고 똑똑히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이기주의나 자기만족적인 내성과 동일한 자아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자기자신을 조금도 사랑할 수 없는 자야말로 정신분석의 도움을 청해야 할 사람이다』
이 말에 따라 정신분석과 영신생활을 위한 정신분석의 도움이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얼마나 큰 노력을 요하는가는 이루말할 수 없다。왜냐하면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이고 억압하는 요소의 우위에 있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이고 아름다운 요소를 가진 인격의 완성이따르기 때문이다。우리가 우리 자신을 똑똑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는 하느님을 더욱더 맑고 평화로운 방향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그리고 일반적으로 부모와 권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순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이제 모든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크리스찬의 태도가 지상 아버지의 자녀로서 가지고 있는 생각에 의해 처음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심리학에서 우리는 사춘기와 성년기에 상처를 남기는「감정적인 병」을 이야기 한다.
정신분석은 자기자신을 더 완전히 받아들임으로써 부모로부터의 감정적인 의존에서 어느정도 벗어나게 해준다。환자가 이러한 감정적인 고리를 없앤다면 자기 자신의 가치를 더욱 잘 경험하게 될 것이다。이 모든 것은 고통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꿈꾸는 것은 사라진다. 그 때문에 새로운 시작, 즉 원래의 벌거벗은 상태가 회복될 수 있다는 보장을 할 수 있는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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