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착화」문제는 우리들 현시대를 살고 있는 가톨릭교인들에게는 특히 그 분야의 전문인들에게는 시급한 문제인 동시에 부하된 의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미술면에서 말했듯이 한복차림의 상본을 그렸다고 해서 그것이「토착화」된 것은 물론 아니요 전례문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그 뜻을 선명히 했다고 해서 모든 과업이 끝난 것은 더욱 아니리라.「토착화」란 그 상본의 내용이 우리 생활이 돼야할 것이고 전례문이 일상대화의 용어가 돼야하지 않겠는가?
문득 우리네 선조들의 일을 생각해본다. 처음으로 서구문명이 도입되고 수많은 새로운 것들이 수입돼 왔을 때 선조들은 그저 어리둥절하고만 있었든가?
오늘날 우리 주변에 도포차림에 망건이나 갓을 쓴 촌노가 나타난다면 아마 10대들은 모두가 괴상한 인물의 출현을 몹시도 신기해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먼 옛날도 아니오 바로 금세기 30년대까지만해도 흔히 볼 수 있었던 우리네 차림새가 아니었던가? 언제 양복이 우리것이었고 언제 구두가 우리것이었단말인가? 그러나 어쨌든 양복이나 구두는 우리의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우리 생활을 지배하고있다. 그러면 과연 토착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생활이요 우리의 환희이며 우리들 자신이다. 억지로 할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며 억지로 못하게 할려도 절대로 그렇게 될 수는 없다. 그것은 밥을 먹으며 일을 하며 서로 담화를 나누며 서서히 아주 서서히 자연스럽게 성취 돼야 할 것이고 또 그렇게 성취 될 것이다. 너무 서두르지 말자!
모교구에서 우리 민요곡조에 기도문을 붙여서 노래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런 방법으로라도 교회음악의 한국화를 바랐겠는가. 그러나 너무 서두르지말자!
우리교회내에도 교회음악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이 몇이 있으나 그러나 타문화권의 것을 그리쉽게 우리 것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팻션쇼」에서 볼 수 있듯이 양장과 한복을 혼합한, 내것도 아니요 남의것도 아닌 괴형을 초래할 것은 없지 않은가? 우리 아리랑곡조에「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사빠또 이른 아침에 종도들이…」하고 노래 불러보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가톨릭음악이 우리 것으로 토착화 할 수 있을까?
토착화란 글자 그대로 내것을 새로이 만드는 뜻만이 아니요 남의 것을 흡수하여 나의 것으로 만든다는 뜻도 포함돼있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가정할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은 몇가지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교회에서 권장하는 노래들을 모두 즐겨부르고 그것이 우리생활속에서 날마다 불리워지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간혹 어떤이에게서 지금까지 성가집 속에 들어 있는 노래는 모두가 하나같이 우중충하고 어렵기만하며 또 가지수도 얼마되지 않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 노래들이야말로 우리들의 성인성녀들이 즐겨 부르고 우리들의 순교자들이 소리 높여 부르며 치명하시던 바로 그 노래들인 것이다. 우리는 조그마한 아낌도 또 연구도 없이 그것이 유행가마냥 自己의 취미에 안맞는다고 배척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둘째로 가사나 기도문이 번역되거나 새로이 만들어질 때 무척 어려운 일이기는 하겠으나 음악적인 념을 해주시라는 문제이다. 한 예를 자수로들면「KYRIE ELEISON」은 그속에 모음 수가 7개 뿐인데 이것을 우리말로는『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로 무려 12개의 모음이 들어있다
비록 다섯개 밖에 안되는 모음수의 차이지만 이것을 음악으로 표현하자면 예사 일이 아니다. 장작을 구공탄 아궁이에 피워서 방을 데우려고 한다고 생각해 본 일이 있는지? 압축된 표현이 아쉽다.
셋째로 새로운 작품이 나왔을 때에는 그것이 자기의 취향이나 이념과 차이가 조금 있다고 하더라도 형제애적인 견지에서 아껴주고 북돋아주어 다음에는 보다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도록 격려해 주어야 될 줄 믿는다. 우리 사회에서 남을 헐뜯어야 마치 자신이 위대해지는 듯한 도착된 관념을 우리 교회안에서만은 뿌리뽑아 화기에 찬 분위기가 조성돼야만 토착화의 속도가 빨라질 수 있지 않겠는가?
넷째로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는 음악인들에게 하고싶은 말은 우리의 것을 살리기 위해 민속음계를 바탕으로 삼는 것은 당연하나 너무 거기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몇가지의 예로 보아 그것을 말할 수 있다. 뿐더러 우리교회는 한국만의 교회가 아니요 범세계적인 교회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너무 새로운 것만을 찾는 심리는 불만스럽고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상태로는 토착화라는 안정된 자리를 바랄수는 없다.
이상과 같은 의견이 타당할런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가운데 하나 만이라도 의견을 같이 해줄 수 있다면 토착화 단계가 하나 줄어들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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