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의 한국 가톨릭교회의 대 (對) 사회참여는 과거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활발하고 적극적이었다. 곧 80년대는「사건」이나「이슈」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교회가 참여하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사회참여가 활발히 이루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성 싶다.
교회의 이같은 활발하고 적극적인 사회참여 활동은 인간구원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는 교회의 근본사명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특히 60~70년대에 비해 한국교회가 사회참여활동을 폭넓고 과감하게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교회 창설 2백주년을 전후해 그 만큼 교회자체가 대내외적으로 성장하고 발전된 결과로 풀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볼때 정치ㆍ경제ㆍ사회 각 분야에 걸친 교회의 활발한 사회참여는 교회의 기본임무를 원활히 수행하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사회참여가 모든 사건이나 이슈에 대한「참여」만을 중시하고 강조한 나머지「방법」과「범위」는 경시하거나 무시함으로써 오히려「참여하지 않은 것보다 더 못한」결과를 초래한 사례들도 적지 않았다는 지적들이다.
결국 80년대의 사회참여활동은 전례없이 다양하고 폭넓고 적극적으로 전개된 것에 비례해 교회내외적으로는「내부갈등 심화」또는「교회 분열조짐」등의 지적과 우려가 나올 만큼 심각한 국면을 맞았던 것도 사실이다.
80년대 교회의 사회참여는 정치뿐 아니라 경제ㆍ언론ㆍ인권ㆍ노동ㆍ농촌ㆍ정의 등 사회문제 전반에 걸쳐 거의 빠짐없이 이루어졌다는 특징을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구원에의 도정에 놓인 인간 개개인과 인간집단을 제일의 관심사로 두고 있는 교회로서는 인간의 어떤 상황이나 문제도 관여하지 않으면 안되는 투철한 사명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80년대 교회의 사회참여가 활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10년간의 한국상황이 변화와 변혁의 소용돌이를 벗어날 수 없었다는 데서도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80년대는 1인 장기집권체제가 무너진 후 새로운 희망의 움이 터오던 상황에서 빚어진 5ㆍ18광주사태를 시작으로 그후 이어진 5공화국 7년의 갖가지 문제들、 그리고 5공청산과 민주화성취를 모토로 내건 제6공화국 출범초기의 갖가지 난제들이 얽히고 설켜 정치권 자체도 문제를 쉽게 풀지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해있다.
이런 와중에서 10년을 살아오면서 우리 교회는 사회참여면에서 교회내외부로부터 때로는 힘찬 격려와 칭찬을 받았으며 또 때로는 강한 비판과 책망을 듣지않으면 안되는、 기쁨과 아픔의 순간들을 경험해야했다. 그같은 사례를 대표적인 몇 가지만 들어보기로 하겠다.
80년 5월 광주사태 발생 후 온 교회가 보여준 노력과 정성은 당시 광주시민들뿐 아니라 국민들에게 가톨릭교회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기회였다.
당시의 본지보도를 보면 주교상임위원회는 5월 23일자로 전신자들에게 특별기도를 요청하는 서한을 발표했고、 사회복지회는 부상자들을 위한 헌혈운동을 전개했으며 수녀장상연합회는 광주위한 9일 기도를 그리고 각 교구에서는 6월 1일부터 한주일 동안 구국 활동을 전개하도록 했다.
6월 16일 에는 광주대교구의 구호성금 2천8백만원이 유족들에게 전달됐으며 6월23일 광주사제들 특별기도、 6월25일 김 추기경 시국관련 담화문발표、 7월 12일에는 계엄사령부에 신부 7명이 연행됐으며 그후 전국 각 성당에서는 나라의 안정과 평화를 기원하는 철야기도회 등이 이어졌다.
80년 5월의 광주사태는 6공화국이 출범한 후 희생자들과 관련자들의 명예회복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긴 했으나 아직도 보상문제 등이 남아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교회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1984년 5월 방한한 교황 요한바오로2세 성하께서도 직접 광주를 방문、 용서와 화해를 역설했지만 그것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교회가 이일에 하루속히 앞장서야할 사명과 책임을 다시 한 번 인식해야할 것이다.
82년 4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범인을 숨겨준 죄목으로 구속돼 3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최기식 신부 사건은 교회범과 실정범이 상충되는 실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교회는 교회법상의 성역 (聖域) 을 주장했으나 정부는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지만 당시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천주교회와 가톨릭의 성직자는 믿을 수 있다』는 의식을 갖게 해준 하나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에 열린 가을 주교총회가 인권 운동을 교회적 차원에서 전개해 나가겠다는 의지로 매년 대림 제2주를「인권주일」로 제정한 것은 대단히 고무적이고 환영할만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84년 9월에는 교황청이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보프신부를 소환、 해명을 요구하고 신앙 교리성이 9월 3일자로「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대한 교서」를 발표한데 이어 한국 주교 상임위원회는「해방신학훈령 적극지지」의 성명을 9월25일자로 발표함으로써 국내 일부 해방신학이론 추종자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기도 했다.
85년 6월초 주교회의 북한 선교부는 남북적십자회담을 맞아 발표한 메시지에서『조국통일은 정치에만 의존할 수 없다』면서 우리 교회의 기도와 노력을 촉구하기도 했다.
같은 해 5월 16~18일 전주교구 문정현 신부가 피납 된 사건은 그동안 몇 년간 대외활동을 중단해온 정의구현사제단이 6월 4일 서울서 8개항에 달하는 대(對)시국견해를 발표하고 이후 다시 활동을 재개하도록 자극을 주었다.
그리고 7월 5일자로 주교단은 노동자와 농어민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룬 사회사목교서「이 사회의 인간화를 위하여」를 발표하기도 했다.
86년 4월 10일 한국평협은 KBS시청료 납부거부운동을 전개했으며 전국 각 교구사제들을 비롯 여자수도장상연、 정의구현 사제단 등이 시국선언문ㆍ성명서 등을 계속발표、 이 땅의 민주화ㆍ인간화를 촉구하고 나섰다. 정의구현 사제단은 9월 언론통제종식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농민회는 미국 농축산물수입저지운동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곧 86년부터 사회참여 활동은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87년도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사건이 5월 18일 정의구현 사제단에 의해 진상이 폭로되면서 5공화국에 대한 불신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다.
본지 87년 1월 25일자 1면은「고문이 인간존엄성을 유린하는 행위」임을 머리기사로 다루었으며 2월 1일자 1면 머리기사는「현정권、 양심있는가」제하에 주교단과 사제단 1백명이 명동에서 故박종철군 추모미사를 집전하고 정평위와 사제단이 성명서를 발표했음을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5월 3일자 1면은 정평위가 민주화 대화 재개를 촉구하는 성명과 주교단이「4ㆍ13호헌은 국민적 합의배반」이라는 담화문을 게재했고 5월10일자 1면은 정평위가 민주화 기원미사를 봉헌하고 사제단 5백71명이 서명했음을、 그리고 11면은 전국교구 사제들이 단식기도에 돌입했음을 보도했다.
6월 21일자 1면은 4ㆍ13호헌 조치철폐를 촉구하는 나라위한 미사봉헌을 다루었다.
바로 이러한 교회의 단합되고 끈질긴 기도와 행동은 마침내「6ㆍ29선언」을 이끌어내는데 크나큰 역할을 한 것으로 교회내외로부터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언론자유와 민주화 등을 위해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둔 정의구현사제단이 선거에서 특정당의 대통령후보를 공개 천거함으로써 교회내외에 큰 물의와 비판을 불러일으킨 사실은 두고두고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야할 것이다. 당시 공개 천거한 사제수는 2백2명으로 돼 있었으나 사제들 중 적지 않은 수가『그 일에 서명한 일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어 사제단의 행동이 보다 신중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금년 7월 문규현 신부의 파북과 추인으로 현재 문 신부를 비롯한 성직자들이 옥고를 치르고 있는 현실은 우리 교회에 큰 걱정과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이 사건은 애초 비밀리에 평양축전에 참가、곤경에 빠진 임수경 (수산나) 양을 안전하게 귀국시키려는 사제단의 애정에서 출발했다지만 결과적으로는 주교단으로부터『국민에게 불안과 혼란을 줄 수 있는 마땅치 못한 행동』이란 지적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교회내부에 분열과 불일치의 모습이 내비치도록 한 것은 어떤 면으로도 교회에 피해를 끼친 것만은 사실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현재도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기도회가 매월 이어지고 있으며 보안법철폐를 위한 천주교 전국 공동위원회가 발족、 활동 중인 현실은 아직도 풀어나가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 지난 10월 16~19일 가진 가을 주교총회가『어떤 단체라도 교회관할권자의 동의가 없는 한 가톨릭 (천주교) 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는 교회법 제300조의 규정을 확인함으로써 정의구현사제단을 비롯한 10여개의 비공인단체들이 앞으로 과연 어떻게 활동할 것인가가 주목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70년대 하반기에 정의구현사제단의 사회참여 방식에 의견을 달리하는 노장사제들의「천주교구국위원회」가 대결양상을 보였는데 주교단은 1977년 가을총회에서 담화문을 발표、『교회 내에서도 시대의 과도적 상황으로 시국에 대처하는 방법상 의견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일치되어 있으므로 어디까지나 형제적이어야 한다. 때문에 견해의 차이는 있더라도 서로의 의견은 존중하여야 하고 형제적 사랑을 해치는 행위는 없어야 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특히『사제들은 주교들과 교황의 지도를 받아 분열의 모든 원인을 제거하고 전인류를 하느님 가정의 일치에로 인도해야한다』고 지적한바 있다.
지금까지 80년대 10년간의 교회의 사회참여현황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교회의 사회참여는 해도 좋고 안 해도 무방한 그런 일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교회의 인간구원 및 세상복음화 임무를 제대로 성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회참여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에 대해 사목헌장 (제76항) 은 교회가『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이 요구할 경우에는 정치질서에 관한 일에 대해서도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로 규정하고 그러나『이런 일에 있어서 교회는 복음에 일치하고 시대와 환경에 따라 모든 사람의 복지에 부합하는 방법을 모두、 또 그 방법만을 사용한다』고 밝히고 있다.
곧 교회의 사회참여는 언제어디서나 교회내부의 일치를 저해해서는 안 되며 그 목적은 모든 인간의 공동복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설정돼있다.
문제는 그 방법과 범위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세상이 변한다고 교회도 덩달아 변해야 한다는 법은 있을 수 없다. 또 그렇게 돼서도 안 된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정치ㆍ경제ㆍ사회제반문제에 대해「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변화와 소용돌이에 말려들지 않고 한발 물러서서、 한 차원 높은데서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지혜와 인내를 가져야할 것이다.
만일 교회가、 그것도 사회일선에 나서야할 평신도들은 뒤로 물러나있고 사제들이 최일선에 나서서 세속 일에 휩쓸리거나 그 안에 파묻혀 버린다면 진정 교회가 해야 할「윤리적 판단」과「구체적 행동」은 누가해 나갈 것인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90년대 우리 교회의 사회참여활동이 나아가야할 방향이 달려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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