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한불수호조약 체결 당시 조선 8도의 천주교 신자수는 대략 1만4천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1866년 2만3천에 달하던 신자가 늘어나지는 못해도 이처럼 줄어든 것은 그해부터 6년간에 걸쳐 전국을 휩쓴 대원군의 병인교난으로 많은 신자가 죽었고 전교활동이 거의 불가능했던 결과였으리라.
한불수호조약으로 신교(信敎)자유가 허락되면서 지하에 숨어 명맥을 유지해오던 교회는 생기를 되찾아 곳곳에서 교회 재건운동을 펴기 시작했다.
성당을 짓고 신학교를 세우고 수녀원을 유치하는 외형적인 재건사업이 눈부시게 진행되는 한편에선 상복(喪服)으로 변장하고 밤에만 나들이하던 신부들이 상복을 벗어 던지고 수단차림으로 팔도를 누비며 전교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전교활동은 지금처럼 적어도 사제관이 마련되고 이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지원을 토대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개척활동이었다.
이들의 활동결과 신자수는 점점 불어나 이로부터 10년 후인 1896년엔 2만9천 20년후인 1906년엔 6만1천을 기록하게 되었다.
신부의 생김새가 다르듯 이들이 벌인 전교방법도 가히 각인각색이었다.
그야말로 집도 절도 없는 외딴곳에 부임한 후 알아주는 이조차 없는 고독을 가끔 주막에 들러 풀다보니 하나를 지면이 늘어 훗날 교회를 세우게되었다는 회고는 결코 과장일수 없는 외롭고 힘들었던 지난 역사의 한 단면이다.
이제 그들이 벌었던 전교활동의 자취를 되새겨보자.
1915년 여름 어느날 지금은 성프란치스꼬 수도원이 들어앉은 대전시 목동 어귀 주막에 베잠뱅이에 밀짚모자를 눌러쓴 30대 청년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이 청년은 한동안 오후가 되면 출근하다시피 말을 타고 나타나 주막앞 정자나무 아래서 동리 노인들과 어울려 장기도 두고 막걸리도 대접하면서 지면을 넓히더니 얼마후 일대 4만여 평의 넓은땅을 사들여 서너칸짜리 집을 짓고 동리 노인들을 초청했다.
『그간 여러 어르신네들을 모시면서 제 소개를 소홀히 했던 점 용서하십시요. 저는 이곳에 천주님의 말씀을 전하러 온 천주교신부 이종순 요셉입니다.』
충청도 남이공소(현 충복부강)에 있으면서 대전 개척 임무를 받은 李신부(1936년 사망)는 이런 방법으로 대전 포교의 기반을 닦아 오늘날 대전교회를 열었다.
당시 대전 시내에는 신자가 열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이렇게 세워진 보잘것없는 성당은 1934년 충복 서천으로 발령받은 조인원 신부는 들어물어 임지에 당도해보니 4천평 성당터만 있을뿐 있다던 성당도 신자도 보이질 않는다.
한참만에 성당이라는 건물을 수소문해 찾았으나 변소도 울타리도 없는 엉성한 기와집 한 채가 전부였다. 얼마후 신자라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그것도 성당터를 일구어 먹겠다는 사람과 심부름 하겠다는 노파세 받기를 청하는 노인 3명이 고작이었다.
『찾아갈 곳도 없고 그렇다고 찾아오는 신자도 없어 마치 절간에 앉아있는 기분이었지요』 그래서 몇달 후 서울서 풍금 한대를사다 성당 마당에 내놓고 틀어댔더니 동리 조무라기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그해 성탄때 30여 명이 영세를 받아 성당꼴을 갖추었고 이렇게 한 3년 했더니 3백여 명으로 늘어나 5년만에 교구 도움으로 성당을 짓게 되었다. 그러자니 개척지에 부임한 신부들은 손수 밥도 해먹어야 하는 고생을 하기도 했다.
충복 옥천지방을 개척한 홍병희(루까) 신부는 수보리방아를 찧어 끼니를 끓이면서 전교했다.
홍신부는 1910년 부임해 13년 선종하기까지 개성 수원 해주와 함께 전교 안되는 곳으로 알려진 이곳에서 고군분투의 생활을 보냈다. 한때 이곳은 서양신부들 권력(?)에 편승해 무슨 이권이나 얻을까 해서 몰려드는 입교자들로 문답책을 수례로 실어 나를만큼 전교가 잘된 적도 있었다. 이성만 신부(이냐시오 은퇴)는 26년 서품과 함께 목포 산정동 보좌로 임명되어 도서지방 전교길에 나섰으나 낮설은 섬에서 잘곳도 먹을것도 없어 그냥 소리내어 울어버리고 말았다. 31년 순천에 부임한 정수길(요셉ㆍ78) 신부는 공소까지 합해야 21명밖에 안되는 신자를 놓고 한심했다.
갈곳도 오는 이도 없어 다음날부터 자전거를 타고 신작로를 왔다갔다 하면서 발붙일 곳을 찾았지만 누구하나 『당신 무엇하는 사람이냐』고 묻는 이도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장터 한 곳을 점령, 축음기를 틀어놓고 사람들이 모이면 한바탕 설교를 하기도 했고 주막에 둘러 막걸리를 마시다 좌중이 수단에 관심이 쏠린 기회를 이용 『나는 천주교 신부인데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으면 성당으로 찾아오시오』하는 유인책(?)을 쓰기도 했다.
그래도 말이 제대로 안 통하는 서양신부들에 비하면 한국신부들은 나은편.
21년에 한국에 와 안성본당 보좌로 부임한 프랑스인 「레옹 삐숑」(송세흥 1945년 사망) 신부는 어학에 소질이 없었던지 몇년이 지나도 한국말이 거북스럽기만 한데 주임신부가 전교 나가라고 하니 거역할수는 없고 해서 생각해낸 것이 장터 산책이었다.
장날만 되면 긴 수단을 입고 「성무일도」를 보면서 장터를 오르락 내리락 했다.
그때의 답답한 심정을 삐송 신부는 훗날 『천주님만은 내 마음을 아셨을것』이라고 회고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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