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마침내 서학의 과학적인 면(물론 당시에 전래된 서구과학지식이란 중세적인 것에서 탈피 못한 것이라는 한계성을 갖고있는 것은 사실이지만)의 섭취로 향하게 되었던 것이니 드디어 성호문인(星湖門人)들인 남인신진(南人新進)들은 이벽을 좇아 놀아 「歷敎之學」을 듣고「기하원본(幾何原本)」을 연구하여 그 정오한 뜻을 분석하였고 마침내 「신교지설」을 들어 홀연히 기뻐했던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경학의 극복을 위한 노력으로 유학의 모순점과 한계성을 실감한 뒤에 서구과학에 흥미를 느껴 실학을 일으키고 서교(西敎)에 접하게 되었다는 것이라 하겠다. 그 결과 이 강학회는 침체된 유학(儒學)의 강조와 극복의 한계점에서 서학을 의식하는 교량적 역할을 했다는 점과 이벽을 통해 「신교(천주교)지설」을 비로소 듣게 되었다는 것은 한국사상사상 지대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조선 후기의 서학은 이 강학회에서부터 이벽을 통하여 그 출발의 기반을 얻어 새로운 문화의식이 싹트게 되었고 그러한 의식에서 나온 행동적인 표현의 구체적인 실천이 이벽으로 하여금 이승훈을 북경에 보냈던 것이다.
한편 그는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고 그 자신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이승훈이 돌아오자 즉시 「요안」이라는 교명(敎名)으로 세를 받고 이벽이 중심이 되어 자기 주위의 양반인사들을 입교시킨 때는 갑진년(1784)에서 을사년(1785)의 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있다. 갑진년간에 이벽의 집은 전술한대로 수표교에 있어 그가 잠심 독서하던 곳으로 여기서 이벽은 제인사들에게 자기 스스로 서교교리를 강학하였고 비로소 종교의식도 행하였던 것이다.
즉 권철신이 주동되었던 주어사의 강학회가 갑신년 이후로는 이벽을 중심으로 한 서학적인 방향으로 변질되면서 상사에서의 집회는 유명무실하게 되었으나 그곳의 인사들은 「首直西敎」한 이벽을 좇아 수표교에서 이벽이 주도하는 서교 중심의 집회에로의 변질을 보게되었다. 또한 최초의 소박한 한국 가톨릭 교단의 형성인 소위 말하는 반성직(反聖職)계급의 단체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교단 집회의 형성은 순전히 자체적으로 수용된 한국 가톨릭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벽은 반성직집단(反聖職集團)의 지도자로서 최초로 「說法敎회」를 하였고 그의 인사들은 모두 제자로서 칭하였다. 그 후 이듬해인 병오년(1786)에 이벽을 좇았던 권철신의 동생인 권일신이 이벽을 계승하여 처음으로 「주교」라는 명칭을 받음으로써 그 종교적인 교단조직의 기반을 굳혀갔던 것이다.
이러한 사건은 한국천주교회 창설에만 나타나는 특색으로써 한민족의 주체성과 체질성 내지 문화적 창조성이 이만큼 강조된 유례가 다른 어떤나라에서도 찾아볼수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서학집단은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사건으로 인하여 커다란 타격을 받게되었고 한편 성균관 유생들과 태학동제생(太學同第生)들이 발문(發文)하여 엄히 「척사학(邪學)」함으로써 이벽을 중심으로 한 서학집단은 일단 해산되는 것이다. 한편 이교단의 최고 주동자였던 이벽은 그 부친의 결사적인 반대를 받아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충효사상(忠孝思想)을 교육의 근본이념으로 하는 이조봉건사회에서 성장한 그로서 포기할수 없었던 효정신의 윤리관과 한편 새로운 진리로써 체득한 Catholicism과 양자 택일해야 되는 개인적인 혹은 한 집단의 지도자로서 참다운 갈등과 곤란을 겪는 것이었다.
그러나 CHㆍDallet신부는 그의 한국 천주교회사 서술에 이벽의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한마디로 언급하기를 「벽은 양보하여 배교를 나타내서 주춤하고 그의 신앙을 감추기 위하여 이중으로 말하고 그 마음은 약해졌으며…」라는 표현으로 그를 한갖 배교자로서 단정하여 서술하고 있다. Dallet신부의 이러한 서술은 그가 외국인신부로서 동양의 효사상의 깊이와 규범을 이해 못한데서 오는 견해 차이며 한편 동양사상의 체득이나 체험의 부족에서 종종 그의 역사 서술의 헛점을 노출시키는 일면이기도 하다.
즉 서양중세의 문화적 사회적 여건과 동양적 한국적사회의 성격이나 체질을 비교하고 규명하여 볼 때 이벽이 경험한 갈등과 주저했다는 행동은 오히려 당연한 인간의 일로 인정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하간 그는 그러한 시련과 고민가운데서 병오년(1786)에 질병으로 33세로써 요절한 것이다. CHㆍDallet신부의 서술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면 이벽은 그의 가톨릭교의 신앙집착 때문에 또는 동서양의 윤리관의 차이 때문에 무한한 고민속에서 죽어갔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갈등이 있었던 까닭으로 해서 그러한 갈등을 일으키는 전통문화의 기반과 배경이 있었던 까닭으로 해서 오히려 서학이해에 있어서 그의 창조적의욕이 발휘되었고 마침내는 조선후기서학사상 수용이라는 기반을마련하여서 한국사상사상(韓國思想史上)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특출한 인물로 등장할수 있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주목할 문제는 광암 이벽이 남긴 저서로써 유일본으로 현존되고 있는 「성교요지(聖敎要旨)」이다. 이 「성교요지」는 한국기독교사상 효시가 되는 국내본일 뿐만아니라 한국서학사상사(韓國西學思想史)의 최초의 자료로 볼수있다.
유례없는 박해속에 조선서교관계서중에 대부분 분실 소실된 서교서 가운데서 거의 기적적으로 남아있는 것이며 이벽의 높은 학문의 수준과 그의 서교사상을 엿볼수 있는 집약서이다. 한편 성교요지는 서교를 수용 이해하는 초창기에 저작된 최초의 사상사적 자료인 동시에 조선 후기의 서학의식구조를 엿볼수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 내용을 간단히 보면 대개 두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볼수 있는데 성교요지의 첫째 부분은 신구약 성서의 내용을 중심으로 읊은 한시(漢詩)로서 성서 이해를 기반으로 한 이벽의 구세관(救世觀) 및 구원관(救援觀)이라 하겠고 다음부분은 이벽 자신의 윤리사상을 교훈하는 정도관(正道觀)이라 하겠다. 이러한 그의 저서는 남인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한국적문화 변천과정에서 그 단계를 집약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볼수 있다. 또한 「성교요지」의 사상저변에는 「천학초함(天學初函)」 및 「동전한문서학서(東伝漢文西學書)」 문헌들의 방대한 내용의 서교정신을 깔았고 수많은 양의 서학서들에서 사상적인 흡수와 영향은 받았지만 이 「성교요지」는 단순한 수입과 모방이 아니라 전술한 바와 같이 한국중세사회가 가지고있는 체질성 위에 성립된 독창성이 생동한다는 점으로 보아 다른 그러한 유서(類書)들과는 같이 볼수없는 것이다. 즉 그것은 당시 사회의 여건들이 필요로 하는 구세관을 함축하였고 이벽의 정도관(正道觀)의 강조는 다분히 이조사회의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과제까지도 의식했다는 점에서 특색이 있는 것이다. 한 편 「성교요지」에서 나타나는 이벽의 설명과 강조점을 종합해보면 신도들에게 종교적인 행사와 의식을 통하여 심리적인 긴장과 새로운 광명의 세계에 대한 희망을 주면서 교단조직의 운영방법도 상당한 정도로 체득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그 정직관(正直觀)에서 시종일관 시사되는 바와같이 종교의 사회참여가 어떠해야 함을 교훈하였고 그러한 면에서 그는 당시 사회에 대한 사명을 의식하였으며 그 의식이 구체적으로 실천화하였다는 점에서 한국사상사상(韓國思想史上)에서 이벽의 서학사상의 가치와 영향을 재평가할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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