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수도회가 북한 공산당의 탄압으로 강제 해산되고, 수녀원이 몰수된 것이 벌써 20년 전 1950년 5월 15일이다。10년을 두 번이나 되풀이하면서 지나간 세월로 보면 객지가 고향이 되고 고향이 객지가 됐어야 했을 것이다。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가시지 않고 생생해지기만 한다。
▲1932년 평양서 탄생
우리 수도회는 1932년 6월 27일 평양시 상수구리에서 탄생하였다。그러나 1941년 12월 8일 세계 2차대전이 터지면서 미국 메리놀 신부님과 수녀님들은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귀국 당하시고 우리는 서포 주교관으로 수녀원을 옮기게 되었다。서포는 평양 서원산 쪽으로 한 정거장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이며 거기의 언덕 위에 사랑의 마음을 포근히 잠재워 주는 중국식 4층 빨간 벽돌집이 점잖게 자리잡고 있다。여기에「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수녀원」이란 문패를 걸었던 것이다。
민족 해방의 기쁨은 오면서 가버리고 무법천지와 공산당의 탄압만이 남았다。
1945년 소련군의 난동 때문에 이북 사람들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고 우리 수녀들도 불안하여 8월 하순부터 2주일 간 임시로 해산하여 모두 귀가한 일도 있었다。
후에 소련군 사령부의 보증서를 받고 모원으로 돌아왔으나 집은 온통 수라장이 되어 있어서 수일 간 청소작업으로 중노동을 해야 했다。
그 다음부터는 공산당의 탄압이 갈수록 심해졌다。한밤중에 찾아와서는 뒷뜰에서 자는 수위가 나올 때까지 계속 초인종을 눌러 그 벨소리는 공포심과 함께 사람의 뼛속까지 사무치게 했다。불시에 찾아와서는 공민증(신분증)을 조사하고 사진과 얼굴을 대조해 보고 그래도 시원치 않아 멋대로 집을 뒤져보고 했다。공연히 보위부로 호출하여 트집 잡기, 노력 대동원, 가택 수색 등 하루도 고요한 날이 없었다。밤중에 문을 두드리고는 유리창을 쳐서 박살을 내고 사라진 일도 있었다。
1949년 5월 14일 홍 주교님은 우리 수녀원에 오셨다가(자전거로) 주교관으로 돌아가시던 중 길에서 비밀리에 납치되어 행방불명이 되셨다。그 후 4일(5월 18일) 저녁 8시경에 마을의 한 부인이 남편의 전갈이라면서 밤 9시경에 수녀원이 습격 당할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이제는 마지막이 왔다고 여기고 우리는 성당에 들어가 어두운 가운데서 성체를 다 영하고 감실을 비워야 했다。에집트를 탈출하려는 이스라엘 백성이 빠스카의 양고기를 먹었듯이 성체를 나누어 주는 지도신부님의 손은 떨렸고 성체를 영하는 수녀들은 긴장과 초조로 목이 타서 성체를 넘길 수가 없어 물을 마셔야 했다。밤을 새워 잡힐 때를 기다렸으나 이날 밤은 무사하였다。그러나 이때부터는 밤만 되면 불안과 공포 속에서 밤을 지새야 했다.『지금은 너희 때요 어두움의 세상이다』(루까 22ㆍ53) 하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였다.『일어나 가자!』라는 홍 주교님의 표어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되뇌이어 주교님의 뒤를 따라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1950년 5월 4일 순안군 보위부에서 소환장을 보내왔다。장앙네따 원장수녀님(장면 박사의 누님)은 병환 중이어서 부원장이신 강베드로 수녀님이 출두하였다。용건은 수녀원 건물을 국가에서 중요하게 쓰겠으니 양도하라는 것이다.「양도」란 신사적인 말로써 압력을 가하는 공산당의 상투 수단은 사람 속을 긁어내리며 좌절감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벌써부터 이때가 오리란 것을 예측하고 마음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주교님이 납치되어 가신 지 1년 되는 바로 그날 우리도 강제 해산되어 수녀원을 떠나야 했다。
성모성월이 무르익는 15일 정든 언덕 위의 성모님 집에서 무법의 침입자에게 주인인 우리가 말 한마디 못하고 내어 쫓겨야 했다。우리는 먼저수도복을 벗고 무명 치마저고리로 갈아입어야 했다。원장수녀님께 드리는 하직 인사는 눈물이 대신해 주었다。사랑하고 존경하는 원장수녀님 정든 언덕집, 사랑하는 자매들과 작별하는 처절한 장면을 필설로는 다 그려낼 수가 없다。원장수녀님은 눈물을 닦으며 마지막 한 수녀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고 서 계실 것을 생각하며 먼저 떠나는 수녀들도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언덕을 내려섰다。이것이 앙네따 원장수녀님과의 마지막 작별이 된 사람도 많다。우리는 그렇게도 못 살게 굴며 괴롭히던 보안소에 들어가 속복(俗服) 사진으로 고쳐 만든 공민증을 찾아야 했다。이것이 없으면 그나마도 우리가 설 땅은 없는 것이다。
무참히 쫓겨나면서도 양과 같아야 했고 강도의 본거지로 들어가 신분증을 만든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모욕이요 슬픔이었다。『우리는 주리고 목마르며 학대 받으며 심한 노동을해서 살아야 했습니다。박해를 받으면서 참아 견디고 세상의 폐물로 인정되었고』(Ⅰ꼬린토 4ㆍ11)
마침내는 쫓겨나 흩어져야 했다。20년이 되는 오늘도 잊혀지지 않고 그 기억이 새롭기만 하다。이제 겨우 집 한 채 마련하기까지 20년을 유랑생활로 지내다시피 하면서 평양의 모원과 앙네따 원장수녀님께 대한 추억, 그때 헤어지고 아직도 소식 모르는 자매들은 잊혀지지 않고 박해로 상처 받은 마음은 불치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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