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에는「싸니」에서 장사꾼이나 늙은이나 선술집을 빼놓고는 모두「평화(平和)」문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삐라가 뿌려지고 포스타가 나붙었다. 여기저기서 회합이 열리고 하루 종일 공장 기계 뒤에서 보던 친구들이 이번에는 조용한 곳에서 모여 회의를 열었다. 신문기자나 정당 간부들이 정치적인 조작이라고 욕하는 이「평화」의 부르짖음은「싸니」의 적극 분자들(공산당원이든 기독교인이든 간에)에게는 차디찬 한겨울에 세상의 새봄에 기대를 걸어보는 희망이기도 했다. 그들은 온 지구에 널려 있는「싸니」같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같이 미소를 입가에 띄고 같은 구호를 부르짖으며 똑같이 기름 묻고 매듭진 손으로 서명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평화」를 얘기할 때는「싸니」가 온통 흑인이나 황색 인종 백인종이 다 모인 5억의 주민을 가진 도시가 되는 듯했다. 여기엔 추운 정월에 뜨겁게 끓어오르는 그 무엇이 있었다.
소란하고 먼지 투성이 공장에서 같은 몸짓을 수천 번 되풀이하는 하루의 고된 일을 끝마치고 체육관 같은 넓은 곳에 수많은 사람들과 어깨를 맞대고『평화』를 위해 모인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피에르 신부도 이들 중의 한 사람이다.
공장에서 수십 톤의 짐을 나르고 노곤한 팔을 안고 공장에서 나올 때면 차가운 공기가 그의 심장을 부풀게 한다. 지나가는 가람들과 시선을 주고받으며 피에르는 또다시 이 얼굴들을 사랑하게 된다.
종일토록 쇳덩이를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나 곁눈질로 힐끗 쳐다보는 눈초리밖에는 만날 수 없는 공장을 벗어나 이제 그는 천천히, 그리고 다정하게 이들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조라」거리에 다가오면서 그는 막일을 시작하려는 직공처럼 두 손을 부볐다. 이제부터 곤란한 친구들을 도와 줘야지-. 참으로 필요한 일! 그러나 조금 후에는 아마 어떤 불행한 친구가 가져오는 때묻은 종이를 몇 번이나 읽으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절망할 것이다. 또 집 없는 양떼들을 이끌고 덧문이 닫힌 길을 헤매고, 피로에 지치고 절망에 허덕이고 나면 잠이 기다리고…실로 인간으로서의 참된 하루 저녁이 되는 것이다.
『공장에서 나올 때 아무 것도 기다리는 일이 없는 친구들은 얼마나 외로울까! 얼마나 맥 빠지고 얼마나 입맛이 쓸까!』
피에르는 속으로 혼자 생각했다.
때마침 앙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피에르와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이 거리의 당세포 책임자다.
『여보게… 오늘 저녁「평화」투사들 회의에 오겠나?』
『글쎄 시간이 있으면 가지』
『그섯이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 아니오?』
『그「무엇」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달렸지』
『자네가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건 나도 아네. 친구들을 도와 준다지. 우리 당의 친구들까지도 자네한테 의논하러 간다더군. 처음에 난 자네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도 알고 있네』
『그렇지만 절대로…』
『나도 알아』
한참 만에 앙리가 큰 소리로 뇌까린다.
『우리가 함께 손잡고 일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나』
그는 똑바로 앞을 응시하고 있다.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엄격한 미소를 띄운 그 자신의 걱정보다도 남의 걱정으로 주름진 그 얼굴이 피에르와 닮았다.
『우리가 함께 손잡고 일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
『일의 종류에 달렸지』
『의심도 많군!』
『아니 의심이 아니라 난 항상 명확한 게 좋소』
『잘 됐소. 나도 그러니까』
『좋소. 그럼 너무 많이 당에 붙들어 매지 마시오』
피에르가 웃음을 걷고 한마디 던졌다.
이번엔 상대방이 성난 얼굴로 대든다.
『자네도 너무 많이 개종시키지 말게』
『내가 언제 사람들한테 권유하는 것 들은 적 있나? 우린「조라」거리 집엔 자네도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네. 문이 활짝 열려 있지. 밤에라도 걱정 말게 내가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시키는 거네』
『아무래도 좋아. 그런데 오늘 저녁 모임에 오겠나?』
『힘 써보지』
『그게 무슨 대답이야… 귀찮은 일엔 손을 대지 않겠다면 몰라도…』
『「평화」는 누구 하나의 독점물이 아니오』
『그럼 오늘 저녁에 만나세!』
피에르는 멀어져가는 앙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푸른 덧저고리에 가죽 샌들 호주머니에 주먹을 찌르고 어깨를 올리고 추위를 이기며 걸어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에르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에게 뜨거운 정이 느껴졌다. 어린애 같은 정을…한바탕 싸우고 나서 친구가 되고 싶은 그런 정을…
『여보게 기다려!』
그는 소리치며 따라갔다. 두 사람은 함께 묵묵히 발을 맞추어 걸어갔다.
앙리가 연설을 하자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머리를 돌렸다. 낯 익은 길손을 만났을 때처럼 머리를 끄덕였다. 또 귀가 닳도록 들은 그 얘기다. 연사는 흥분한 나머지 목소리까지 가끔 변한다.
손을 휘젓는 품이 마치 상대자를 붙들고 마구 흔들며『내 말이 정말이다!』라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자신의 이론에 스스로 매혹되어 거침없이 연설을 이어갔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그 위대한 이론과 거창한 낱말들을 들어야 했다. 이 세상의 발전, 사회 경제인 운명 등등… 안 나오는 말이 없었다. 듣는 사람들은 때로는 만능의 신(神)이 되고 또 어느 때는 보잘 것 없는 미미한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는 벌서 몇 번이나 얘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 얘긴 벌써 몇 번 들었는데-청중은 다소 지루한 듯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
앙리의 연설이 끝나자 모두 박수를 했다.
『오늘 저녁엔 말 잘했는데…』
마치 연주가에게 음악보다 연주하는 방식이 더 중요한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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