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 계시의 관조만이 아니고 계시의 생활화를 체계적으로 질서 지우는 학문인고로 산학의 토착화는성서와 교회사와 민족 문화의 유산을 연구함이 그 출발점이기는 하지만 신앙생활의 토착화 없이는 신학의 토착화는 공염불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신학이 신앙생활을 인도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또 신앙생활이 신학을 규정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학문과 생활은 상관관계에 있는 만큼 구체적인 신앙생활의 토착화도 병행해야 되겠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예비신자에게 교리 강의를 할 때 포교지방에서는 호교론적 논증을 통하여 수강자의 종교심을 일깨우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하느님의 존재나 인간의 영성에 관한 문제까지도 거론해야 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인에게 내재하는 이 종교심 자체가 신앙의 출발점은 되지만 종교심의 발굴이나 고취만 가지고 즉시 그리스도교적 신앙심의 발현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종교심은 인간 정신의 속성의 하나이지만 그리스도교의 신앙심은 초자연적 선물이요 인간 이성의 초월적이고 의식적인 선택이요 결단이기 때문에 본능적인 종교심에 대하여 불타 대신에 그리스도를 그 대상으로 제공했다고 불교도가 그리스도교도로 돌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회두와 회심이 없는 개종만 가지고는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적 신앙이 토착화하기 위하여 관상생활의 전통이 필요하고 교리 이해에 있어서도 추상력이 부족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이 백성들에게는 주리적인 해설보다 심정적인 체험에로 유도함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혹시 이런 견해가 소위「모데르니즘」적 위험을 내포한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으나 은총을 전제로 한 체험주의는「모데르니즘」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인 것이다.
실천신학의 분야에서는 아리스토렐레스의 윤리학이나 로마의 법리주의를 바탕으로하는 인간관계의 이해보다 仁義禮智信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관계에서 들어나가는 것이 쉽게 수락될 것이다. 원래 그리스도교회 고유한 덕성이란 신덕 망덕 애덕밖에 없고 또 그것들은 초월적인 것이기에 다른 덕향으로 대치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신망애 삼덕이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바탕이요 특성이며 다른 모든 윤리는 인간관계인 만큼 그 나라 그 민족의 문화 유산에 따라서 정리될 수밖에 없다.
윤리에서는 선악을 따지고 예술에서는 미추를 따지는 것이 서양적인 사고방식이지만 동양인은 윤리에서도「아름다움」과「더러움」을 느끼고 예술에서도 선함과 악함을 느끼고 있다. 이런 것은 생활의 지혜에 속하는 것이기에 형식논리학만으로 따져 들어가도 소용 없는 짓이다. 토착화는 바로 이 지혜의 터득이 아닐까 생각한다.
2백년 동안 한국에서 사용해온「애주애인」이라는 교회 용어보다「경천」이니「홍익인간」이라는 문자가 더 친근감을 주고 내 것이라는 기분이 드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인지 모르겠다.
실생활을 고찰하려면 예의범절에까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전래생활의 토착화를 들 수 있다. 공의회 이후로 이 방면에는 많은 발전이 있었음을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용어를 국어로 한 것밖에는 이렇다 할 진전이 없다. 전례학의 불모지에서 예식만 건드리는것도 무모한 일이지만 전례정신의 표현인 예식의 토착화 없이는 전례의 생활화는 불가능하다. 미사예식의 생소하고 복잡하고 기이함과 성사거행에 있어서 상징적 행동의 과잉 표현과 집례자의 예식 독점과 장례나 혼례미사의 지루함과 면구스러움은 우리 생리에 맞는 엄숙하고 경건하고 약간은 신비스러운 제례 거행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자세한 것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우선 전례 범절의 한국화를 위하여 몇 가지 제안을 해보면 예식에 한국적인 상징과 예의범절을 채택할 것, 어문은 직역에만 치중하지 말고 한국어법에 맞게 할 것, 동작과 경문의 과잉 구사를 지양하고 침묵과 묵상의 시간을 충분히 가질 것, 주례자가 독점하지 않고 참석자들도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 이미 교리를 알고 로마 전례에 익숙한 신자들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미신자들이라도 그 깊은 신비는 이해 못할지라도 상징적 행위는 알아들을 수 있도록 우리네 생활 감정으로 친근할 수 있는 예식을 연구하고 발전시켜야 되겠다.신학의 토착화는 교리와 윤리와 전례 외에도 법제, 관습, 성직자 수도자의 생활양식 등등 고려할 점이 너무나 많으므로 다른 분들의 연구에 이런 문제를 맡기고 지금까지 말한 것을 정리해 보겠다.
계시가 주어진 태초부터 인간은 이 계시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신학적 탐구를 해 왔고 구약시대는 헤레아적인 이해가 있었고 신약시대는 새로운 문화가 그리스도교와 접촉할 때마다 다른 형태의 신학이 발생하고 저마다 가치 있는 기여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 생활의 지주와 기반이 되려면 신학의 원천인 성서와 계시의 생활화인 교회사와 민족 문화의 유산을 깊이 연구하고 전례생활을 비롯한 실제 신앙생활의 토착화를 통하여 한국적인 신학의 정립이 필요하고 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의 계시는 만민에게 주어진 것이고 하느님의 대계시인 그리스도 안에「모든 성도들과 함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을」권리와 능력을 주시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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