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 죄 없이 총살 당하는 사람이 총 쏘는 대원들을 미워하는 줄 아시오? 그 지휘관을 미워하는 줄 아시오? 그 재판관을 미워하는 줄 아시오? 아닙니다. 그는 이 사람들이 모두 도구라는 것 좋지 않은 제도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사회가 나쁜 것이지요. 거기서 이익을 취하는 자도 결국은 희생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자들을 미워해 봐도 별 수 없지요. 그 제도가 나쁜 것입니다. 그 제도를 공격해야지요. 그러나 그들하고는 얘기를 해야 합니다 미워하는 데 힘을 얻는다고 생각하면 바로 그 반대로 행동해 보십시오. 그들을 아니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 보십시오. 얼마나 힘이 생기는지 알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안에 여러분들 주위에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평화를 이룬다는 건 얼마나 좋습니까?
평화란 남을 사랑하고 또 남을 사랑하게 하고! 이렇게 온 세상에 사랑이 번져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요…』
피에로는 낮은 소리로 마지막 말 끝을 흐렸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깊은 침묵이 흘렀다. 기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피에르는 조용히 두 손을 내리고 미소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제 끝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월(4月)의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박수도 아랑곳 없이 피에르는 제 자리로 돌아갔다. 루이는 놀란 어린 애처럼 입을 딱 벌리고 안경 너머로 휘둥그래진 눈을 굴리고 있었다. 늙은이는 옆을 지나가는 피에르의 말을 덥석 잡았다.
『사실이야. 피에르, 그게 진실이야』
루이의 목 쉰 소리가 들렸다. 그가「신부」라고 부르지 않고 정답게 피에르를 이름으로 부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회장에서 나오니 길이 온통 눈에 덮여 있었다. 남 몰래 놀래 줄 일을 꾸미고 있는 어린애처럼 가만가만이 눈은 온 세상을 순식간에 은세계로 만들어 놓고 이제는 천천히 내리고 있다. 그 정적 속을 다섯 사람이 묵묵히 발을 옮기고 있었다.-피에로 마드레느 루이 쟝 그리고 권투 선수 같은 미셀 그들은 싸늘한 공기를 가슴 가득히 들이마셨다. 제각기 고독을 씹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딘다. 어디에 진리가 있었던가? 동료들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회의장에? 아니면 이 차디찬 눈벌판에?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그 연솔 속에 있는가? 아니면 이 정적 속에 있는가?
『제기랄? 조금 전이 훨씬 좋았어!』
미셀이 내뱉는다.
『그렇지도 않어!』쟝이 중얼거렸다.
등 뒤에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앙리였다. 눈 때문에 희끗희끗해진 머리칼이 피에르를 닮았다.『여보게, 사람들이「조라」거리의 자네집에 평화투사단의 본부를 두자네. 어떻게 생각하나?』
『아니, 지금 이대로도 얼마나 복잡하게요.』
마드레느가 웃었다.
앙리는 달갑지 않은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았다.『그 친구들은 대부분 거기엔 발도 디뎌 놓지 않았던 자들이오』
『…이런 일이 없으면 한 번도 오지 않을지 모르지』피에르는 속으로 생각했으나 잠자코 한마디 물었다.『그런데 어디에 본부를 설치할 예정이었나?』
『우리집에』피에르는 앙리와 협력하는 것이 좋겠다고 단정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눈이 발 밑에서 빠삭빠삭 소리를 냈다. 앙리의 신발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는 추위에 재채기를 했다.
『그래 어떻게 하겠나?』
『글쎄 자네도 알다시피「조라」거리엔 다른 일이 있지 않나. 그럴 장소도 시간도 없는데…』
『겁나는 모양이군』앙리는 오히려 가벼워진 기분으로 뇌까렸다.
『할 말 다 했나?「겁낸다 몸을 아끼고 싫어한다」하는 따위 소리를… 오늘 밤엔 내 몸을 아끼지 않은 것 같은데. 안 그런가?』
『자넨 오늘 밤 말을 잘 했어』피에르가 발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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