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었다. 속속들이 곪아 있다고 우리는 곧잘 사회를 개탄한다.
사실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기열을 토해대는 우리는 대체 어디에 속한 사람들인가. 재미없는 연극의 관람객이나 된 듯 후딱 욕이나 해치우는 자세를 성보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인가. 사회 발생의 연원을 돌이켜보면 얼마나 흉흉한 범죄가 들끓고 얼마나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든,인간은 아무도 그것과 무관할 순 없는 것이다.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 외부로 표출되는 예는 거의 없다』어떤 부패도 결국은 「우리」자신들의 산물인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한국적 부정의 악순환이나 윤리의 퇴폐문제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들에게 책임을 물고 진지한 내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남자는 남자로서 여자는 여자로서의 양식과 주체성을 확고히 진지하면서 상호 협조했다면 적어도 이토록 무절조하고 파렴치한 기풍이 조성되진 않았을 게 아닌가. 무엇보다 사회 구성 단위로서의 가정, 그 주무 담당자인 주부 내지 여성의 건강 여부를 검토해 보지 않을 수 없어진다. 동시에 여성과 직업, 직업을 가진 여성의 가정 관리문제, 여권 주장 이전에 마땅히 해야 할 책임, 인간 여성으로서의 성숙을 여성문제 전반을 과거로부터 대충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상기와 같은 취지의 설문에 대한 응답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본 것이다. <편집자>
◆응답자
이승우 씨(서울대교구 청소년 교리교육연구회 총무)
유재진 씨(한국 리크레이션협회 지도위원)
윤병희 신부(가톨릭출판사 편집장)
김인자 씨(서강대학 교수)
장원찬 씨(총무처 총무과장)
박재임 씨(조선일보 기자)
김분칠 씨(한양대학 교수)
(無順)
○ 한국의 이브들·굴종사·공짜로 얻은 여권과 병리 ○
이브는 고독했다. 최초의 모반 이래 굴종으로 인내로 다함 없는 눈물로 비극의 구체화는 시작됐고 그 숱한 핏빛 모퉁이를 온몸으로 허위허위 돌아와야만 했다. 교만은 그토록 뗄래야 뗄 수 없는 검질긴 고독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엿한 반려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대대로 이브에게「너무했고」그 전제가 이브로 하여금「억울함」의 감각조차 마비된「등신」이 되도록 강요해 온 것이다. 특히 동양적인 폐쇄사회 속에선 모독적인 온갖 도덕율로 하여 추호의 발언권도 없었음은 물론, 개성이니 자아니 하는 고급(?) 관념들은 아예 발 불일 틈조차 없었다. 자아라는 어휘를 미처 몰랐으면서도 빛나는「직각」으로 스스로의 생을 위대하게 살아난 여상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개는 자각과 의식 이전의 생활을 꾸역꾸역 이어간 데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여자들의 허영과 방종은 바로 그 오랜 노예 근성의 도착된 발로로 볼 수 있다. 세계 최초로「여권 선언」을 발표한 프랑스의 드·귀즈 여사가 1백70년 전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어떤 류의 비장한 자각도 없이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여권이란 낱말만을 차용했음을 뜻한다. 하기야 우리나라에도 그런 여성이 영 없었다는 건 아니다. 조선왕조 말엽(1899년)에 그 굳어진 환고를 대항하여「여우회」란 단체를 조직한 정향숙 여사의 40명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에 명을 기다리느라고 일주 동안이나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임금께서 먼저 후궁을 물리치시고 공경대부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축첩을 못하도록 칙령을 내려 주십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여성운동은 대체로 운동이란 이름을 붙여 줄 수 있을 만큼 적극적인 것은 못 된다. 8.15 해방 이후 제도적으로나마 남녀 平等이 이뤄진 것은 전취한 것이라기보다는 서구 문명의 도입 추세에 따라 거의「공짜로」얻은 것에 불과하다. 무수한 병리가 속출하는 것은 내실임을 들일 수 있는 주체의식과 노력의 결여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한국 여성들은 비로소 개안의 초기에서 있는 자들이 왕왕 저지르는 가치에의 착각과 혼란의 시점을 아직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여성, 자아, 가정 바람직한 아내와 모상
그런데 오늘의 사회는 여성으로 하여금 더 이상의 타성적인 안역를 허용하진 않는다. 정서의 대상으로 혹은 피보호자나 약자로만 머물 시기는 이미 지난 것이다. 가정이건 사회건 항상 능동적인 참여의식을 요청해 온다. 여기의 필수조건은 나름의 질서 속에서 다듬어진 확고한 자아이다.『벙어리 3년, 소경 3년, 귀머거리 3년』이란 인습적 허세철학만으론 훌륭한 아내가 될 수도 없고 현명한 어머니가 될 수도 없다. 부부생활의 영위를 위해 이따금은 벙어리가 되는 것이 좋을 때도 있지만그「벙어리처럼」역시 스스로 바람직해 택하는 의식적 태도여야 하는 것이다. 환언하면 희생을 바칠 때든 주장을 할 때는 모든 것을 자주성과 이성과 밝은 애정으로 하라는 것이다. 덫에 걸린 쥐새끼처럼 허둥대며 억울해하기만 해서야 어떻게 진정한 부덕이나 겸손에 도달하겠는가. 주어진 여건 내에서 자기를 자기할 줄 아는 자세가 긴요하다.
서양 격언에『가장 현명한 여자는 밤에는 창부가 되고 낮에는 정숙한 주부가 될 줄 아는 여자』란 말이 있다. 남편의 축첩이나 성적 배회를 시샘하며 앙앙거리거나 덩달아 자유부인이 되기보다는「남편의 정조를 수호하는」부인의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는 얘기다. 배웠다는 여자, 소위 교양 있다는 여자가 평등을 주장한답시고 남편에게 마구 삿대질을 해대는 장면처럼 불결한 것도 없다.
결혼에 필요한 것은 뇌 속에 축적된 암기 지식보다는 나름으로 쌓아온 지혜이기 때문이요, 그것이야말로 참된 교양미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릴 위주의 추세에 편승하여『적당히 연애하고 이기적으로 결혼한다』는 풍조 또한 검토해 볼 일이다. 도대체 사랑에 순할 줄 모르는 여자가 결혼에 순할 수 있을 것인가. B. 쇼의 말처럼 결혼이 다만「비즈니스」로 추락해서야 되겠는가. 행복이나 애정의 추구, 또 섹스는「테스트」할 게 아니라 부부가 함께「건설」해 가야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겠다. 동시에 여성은 설익은 여권론을 운운하기에 앞서 스스로의 책임과 의무를 자각해야 한다. 보다 자유로운 땅을 찾아 단봇짐을 쌀 게 아니라 자신의 조건을 흔쾌히 수락할 줄 아는「용기」를 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은 필연코 여성 자신들의 인격적 성숙을 필요로 한다.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나 관습을 존중할 줄 아는 여자, 그러면서도「부당」은 부드럽게 수정해 갈 줄 아는 여유를 지닌 아내-여린 듯 수줍은 듯한 외양 속에 강력한 심대를 갖추고 있는 여자를 우리는 참으로「기뻐하는」것이다.그것이 발가벗고 시가 행진을 해대는 어느 나라의 여자들과는 달라야 할 한국적 여상 내지 모상의 이상이 되는 것이다.
▲여성과 사회·직업을 가진 여성들과 가정·갈등의 극복·자녀교육
그러면 여성은 이제 어떤 자세로 사회에 나갈 것인가? 직장은 어떤 여성들을 요구하며 주부가 직업을 가지는 경우 어떻게 운영하면 직장과 가정의 원활한 조화를 기할 수 있을까? 이것은 참으로 커다란 문제다. 우리나라의 총근로자 중 45%가 여자요 그 3분의 1이 주부라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 8.15 전까지만 해도 직장여성은 희귀한 수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도 의사 약제사 교사 배우 등의 직종에 한정돼 있었다. 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여성의 직장 진출을 백안시하는 경향도 농후했다. 그러나 나날이 복잡다단해 가는 사회 구조상 이젠 여자의 능력이나 노동력을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시대다.『여자니까』식의 자기 비하가 이전처럼 용서되지도 않는다.『가정이나 사회로부터의 기대의 결핍이 여성을 무책임하게 만들었다』고 스스로의 무능을 변명할 여지는 없는 것이다. 오로지 자기 자신에 대한 바른 이해와 긍지로 최선을 다하는 투철한 자세만을 부지런히 키워가야 할 뿐이다. 처녀든 주부든 예외가 있을 수 없다.『시집갈 동안만 잠깐 머무는 거니까』미소 공세로만 우물락주물락 넘기는 자세는 유치하기 짝이 없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항상 오늘이요 그 오늘날 얼마나 살뜰히「살아냈느냐」하는 것만이 그 인생 전체를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부부 맞벌이의 경우나 실직한 남편을 가진 직장여성일수록 양 세계에 동시에 충실할 수 있는 내적 폭을 길러야 한다.
부부싸움과 갈등에 말려 버둥대는 것은 물론 남편 쪽의 자세가 보다 큰 원인이 됨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남성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동양 특히 한국의 남편들은 정서적으로 아내에게 지극히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남편보다 늦게 귀가하는 아내, 다사로움 없는 건방진 태도는 이윽고 남편을 노하게 만들고 방황하게 만든다. 바람을 피운다. 열등감이나 노이로제에 빠진다 하여 사태 수습이 어려워질 때에야 비로소 후회하는 우둔을 범치 말란 얘기다. 어떤 공간 속에 위치하든 항상 탁월한 심리학자이길 포기해선 안 되는 것이 여자라 함은 그런 뜻에서 참으로 수긍이 가는 견해다. 자녀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유아, 유아기와 어머니와의 관계는 그 인간 전체의 인격 발달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고들 하지 않는가. 유아 말기로부터 대개 자아가 싹트니 만큼 어머니는 아동 심리에 있어서도 나름의 일가견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박사학위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민감을 활용하여 체험으로 직관을 얻어 가진 이야기다. 쉼 없이 공부하고 쉼 없이 생각하며 안목을 넓힐 일이 무엇보다 요긴하다. 종교교육 역시 자연스러움과 부드러움, 자기 가정 특유의「무드」를 조성해 가면서 점진적으로 시킬 일이다.
『왜 조과를 안 바치느냐』고 덮어놓고 윽박질러만 댄다면 유동과 변조가 심한 아이들의 기질로선 지긋지긋하다는 인상밖에 안 남을 것이다.
▲한국 속의 여성, 진아의 구현
끝으로 인간으로서의 여성과 그 진아에의 모색에 시점을 모아 보자. 무엇이 진정한 미인가. 오늘날과 같은「감각문화적」(솔로킨의 용어) 사회 속에선 외적인 미가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미처럼 보이기도 한다. 외부든, 내부든 아름다운한 탐색해 볼 가치는 있다. 다듬고 꾸미는 여자를 무조건 유치하게 보는 견해야말로 유치하단 얘기다.「仁」의 정수에 도달하려면 까다로울 만큼「禮」를 실행해야 한다는 공자의 사상을 빌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문제는 다만「너무」에 있다. 몸뚱이를 꾸미고 어떤 식으로든 인정 받으려 허덕대는 짓만 빼버리면 아무 것도 없는 여자들이 있어 소비성향이 어떻고 사치 허영이 어떻고 하는 논란들을 야기하는 것이다. 또『「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면서 자신의 욕망을 마구 확산해대는 여자들 때문에 방송이나 퇴폐가 거론된다.
사실 그것은 「겁나는」세력이다. 그 무식한 착각과 그것이 끼치는 해악의 큼 때문이다.
「자연」이 대체 뭐냐. 신이 마련해 주신 그 태초의 관념은 무엇이 있는냐를 생각해 보노라면 그런 위험천만한 오류에 빠지진 않을 것이다.즉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연 역시 보다 낮은 능력(感性)이 보다 높은 능력(理性)에 종속돼 있는 상태라야 하는 것이다. 자기 내부에서 들끓는 야수를 길들이지 않고서는 아무도 진실된 자유나 평화에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여성, 자아 구현의 길 역시 이렇듯 전인적인 인격 수양과 직결된다.
부단한 성숙과 부단한 자성, 온 존재로 앓아가며 체득하는 예지 잠들 줄 모르는 의식의 청명-그 모든 것을 독자적인 법칙 속에 편성해 가야 한다. 오직 관념의 희롱으로서가 아니라 하루가 포함하는 사소한 일상까지 온 가슴으로 포옹할 수 있는 넓이와 사람을 가져야겠다. 그러기 위해 가장 필요한 덕은 무엇보다 끈기요, 성보일 것이다.『결혼 이후부터 무지에 가속도가 붙더니 이젠 말발조차 통하지 않는다』는 남편의 불만을 들어서야 되겠는가. 게으르기로 유명하고 책 안 읽기로 유명한 한국 주부들은 이 점을 특히 반성해야 할 것이다.
토픽에 나오는 자유 분방만을 볼 게 아니라 서구 여자들의 부지런함부터 본받아야 할 것이다. 참으로 부자런만 하다면 일부러 구호를 외치지 않더라도 사회 정화의 일익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텅 빈 꽹과리일수록 소리가 요란하다』는 속담이 있다. 자신의 위치를 충실히 살아가지 못하는 자일수록 타로 향한 불평과 요구가 많다. 인정받겠다고 아글아글 해대는 동안은 아직 인정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여성이 지금 할 일은 우선 한국을 이해하고「자기 것으로」규정하는 일이다. 요구할 거리를 찾지 말고 해야 할 바와 함으로 해서 타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을 즉각즉각 찾을 줄 아는 민첩이다. 자신을 양육하는 한편 양육돼 가는 자신을 보고 이웃이 양육될 수도 있는 강력한 동기로 자기를 쓰는 것의 미를 위해서라면「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자신을 극대로 활용하겠다는 단호한 결의의 실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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