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깐 공의회 이후 우리나라 가톨릭교회는 토착화라는 문제에 대하여 교회 안에서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논란이 되고 있으며 얼마 전만 해도 몇몇 교회에서는 단편적으로나마 이에 대한 시험을 가졌었다는 말이 있다.
그 중에도 가장 신자들의 흥미를 끌게 한 것은 교회음악으로서 토착화라는 기치 아래 우리나라 고래의 민요조와 요즘 한참 유행되는 대중가요 곡에다 가사를 인용해서 성가를 부르고 민속무용을 본딴 듯한 야릇한 몸짓으로 주님을 찬미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러한 것들은 누구 하나 제대로 토착화에 대한 연구기관도, 위원도 없이 토착화라는 단순한 매력 때문에 그헣게 해본 것뿐이다. 그러나 오늘날처럼「매스 미디어」가(앞으로는 더하겠지만) 온 세계를 압도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 교회 용어의 일반화는 참으로 중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4월 26일자 가톨릭시보 1면의 토착화란은「교회 용어」에 대한 몇 가지 문제와 갈 길을 어느 정도 제시했고 또 필자는(김남수 신부) 막연한 비판보다 건설적이고 실질적인 대안의 제시와 협조를 가톨릭 기관지에 게재하기 바란다고 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평소부터 자주 느껴오던 교회 용어의 미흡한 점과 각종 매스콤과 일반 사회에서 거의 말살되려 하는 우리네 교회 용어에 대해서 일개 평신자로서 우려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어 언젠가 한 번은 이에 대한 제언을 하고 싶었다.
첫째 요즘 우리 교회에 널리 쓰이고 있는「사목」에 대한 용어이다. 이 사목은 현재「사목」이라는 제하의 정기 잡지까지 발행되고 있고 각 교구별로도 사목위원회가 있어서 사목에 대한 회합이 종종 열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그래서인지 우리네 출판물에도 사목이라는 낱말이 자주 나오곤 한다. 그런데 어느 성당 지성인이요 중견 간부인 한 사람이 사목이라는 제하의 교육이 있을 때 사목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고 한문으로는 어떻게 쓰느냐고 질문했다. 그때 그 초빙 연사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사목이라고 한문으로 쓰고 司자는 무슨 사자라는 주석을 붙이지 못하고 牧자만 그냥 연사 나름대로 牧者라는 牧자라고 얼버무려 버렸다.
그 후 국어사전에서 찾아봤더니 사목이라는 낱말은 나오지도 않았다. 겨우 한한대사전에서 사목이라는 낱말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마찬가지로「보속」도 그렇다. 보속이라는 말은 오래 전부터 사용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역시 사전에는 없었고 「은사」는 사전에 나오긴 하는데 우리 교회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뜻은 없고 단순히 죄수의 사면령(赦免)에 대한 것으로만 돼 있었다.
이처럼 우리가 중점으로 사용하고 있는 교회 용어가 어제 오늘에 생긴 것이 아닌데도 우리 국어사전에서 빠져 있다는 것은 현대는 물론 후대의 교육문제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는 것이 되고 말지 않을까.
그리고 아직도 가톨릭 공용어심의위원회에서 계속 연구하고 있다니 저으기 다행한 일이라 하겠으나 지난 번 김남수 신부님께서도 지적했듯이 우리말은 거의가 앞뒤가 있어서 접두사니 두문법이니 접미사니 하여 말의 머리와 꼬리를 지어 주어야만 대중성이 있어서 누구나가 쉽게 쓸 수 있는데「천주께 감사」「주께 영광」등은 참으로 처음엔 토막난 막대기를 씹는 격이었다. 이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생각엔 그것이 그냥 서로 간의 대화체가 아닌 하나의 창법(唱法)으로서 온 것이 아닌가 한다.
「천주께 감사」「주께 영광」을 그레고리안 식으로 창을 하게 되면 그렇게 딱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경어(敬語)가 발달된 나라에서는 주께 영광은「주님께 영광」이 더 낫지 않을까 한다.
그냥「주께 영광」하면 발음만 들으며 「죽께 영광」으로 들려 죽는 것이 영광이라는 씁쓸한 뒷맛이 입에 감돌므로 「님」자를 붙여「주님께 영광」이나「천주님께 감사」가 더 좋겠다 하겠고, 성체를 영해 주는 사제가 하는 말 중에「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도 깊이 생각지 않더라도 너무나 경박한 감이 난다.
참으로 흠숭지례라 하여 최대의 경의를 갖는 성체가 갑자기 닭털처럼 가벼워진 것 같아서 아무리 오늘날의 예수님은 엄위가 아니고 자비라 하지만 사적인 신앙행위를 떠나 공적인 미사에서의 성체가 갑자기「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할 때는「서체」가 있고 「그리스도의 몸」이 따로 있는가 하는 느낌이 든다. 옛날 구약시대는 천주님의 이름을 감히 부를 수가 없어서「아도나이」라 하여 주님(主)으로 부르지 않았던가. 더군다나「그리스도의 몸」은 창법도 될 수 없으므로 사제가 성체를 영하는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알리는 뜻에서「그리스도의 몸이요」가 아니면「주님의 몸이요」로 하는 게 좋을 것으로 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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