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개념은 단순한 정의로 가늠하기가 어렵다. 사전은 철학적 개념으로 문화를「인간이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이상을 실현하려는 활동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해낸 물질적ㆍ정신적 소득의 총칭」이라 명시하고 있다. 아울러 학문ㆍ예술ㆍ종교ㆍ도덕 등의 정신적 소득을「문화」라고도 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종교는 그 자체로서 문화란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고 종교 활동=문화 활동이라는 등식도 성립될 수가 있다. 그러나 종교를 하나의 주체로 독립시켜 낸다면 문화는 종교라는 틀을 토대로 별도의 개념으로 논의되어 질 수가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80년대 한국 가톨릭교회의 문화 활동은 어떤 평점을 받을 수가 있을까. 결론은 손쉬운 답변을 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교회가 아직 문화를 독립된 개념으로 생각할 만큼 성숙되어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당이나 병원、 회관 등 시설을 짓는 것과 같이 명쾌한 모양으로 문화를 떠올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늘어나는 신자를 수렴하기 위한 공간마련이 아직도 시급하고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는 일이 우선되어왔고 또 아직도 그 같은 인식이 팽배한 현실 속에서 문화가 별도의 개념으로 교회 안에 자리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불리한 여건을 전제로 한다면 80년대 한국교회의 문화적 결실은 작은 점수로도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척박한 풍토 속에서도 1980년대의 한국 가톨릭 문화 활동은 70년대에 비해 비교적 다양하고 풍요한 형태로 전개됐다고 말할 수 있다.
우선 쉽게 떠오르는 문화 활동으로 출판 분야를 꼽을 수가 있다. 「통일성가집」「가톨릭대사전」등 굵직한 주제의 출판 작업에서부터 수상집ㆍ시집ㆍ묵상집ㆍ교리서ㆍ전례서ㆍ해설서 등의 발간과 더불어 각종 번역서적들의 출현은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전문성과 현실성 그리고 정화성과 객관성 등의 문제가 뒤따른「통일성가집」과「가톨릭대사전」은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물결을 타고 관심과 이목이 집중된 대 작업으로 전개됐다. 그러나 내용의 중요성과 비중에 비춰볼 때 교회전체의 관심과 지원은 극히 미약、 이들 작업들은 긍정 속에서도 부정이라는 평가를 숙제로 안게 됐다.
출판의 경우 일반 서적류는 교회 출판사들의 의욕에 힘입어 비교적 왕성한 활동을 보인 시기였다. 신앙 서적류가 주류를 이룬 80년대의 출판 사업은 신학교리ㆍ전례서 등을 비롯、 여러 장르에 걸쳐 다양한 책들이 선보였다.
그러나 번역서적류에 비해 창작류가 그 수량에 있어 크게 뒤떨어진 상황은 호황이라는 현상 속에서도 불황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숙제를 남겼다.
가톨릭신문ㆍ경향잡지로 대표되던 교회 정기간행물들이 크게 늘어난 것도 80년대의 흐름이었다. 생활성서ㆍ성서와 함께ㆍ빛ㆍ가톨릭 다이제스트ㆍ가톨릭사회 그리고 평화방송ㆍ평화신문의 출현이 바로 그것이었다.
분출하는 문화적 욕구의 일면을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는 이들 정간물들의 출현은 독자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제공해주고 선의의 경쟁이라는 의미도 부여되긴 했지만 긍정적 측면과 함께 부정적 현상도 제시해준 결과를 가져왔다.
현재 이들 정기간행물들이 거의 대부분 자립운영이 어려운 상태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진 비밀(?)이고 획기적 조치가 없는 한 부정적 입장에서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분출하는 문화적 욕구는 이를 만들고자하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이었고 정작 이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하는 대부분의 독자층은 아직 피동적 자세에 머물러있다는 것도 부정적인 결론의 이유가 된다.
따지고 보면 이 같은 현상은 신문이나 잡지、 그리고 책 한권 보는 것이 교육의 일환이라는 개념이 아직 교회 내에 자리하지 못하는데 기인한다 하겠다. 뿐만 아니라 교구 간에 분명하게 금그어져있는 경계선、 그 한계를 넘지 못하는 폐쇄성에도 기인한다고 여겨진다. 내 것에 대한 강한 욕구가 결국 남의 것에 대해 배타적일수 밖에 없는 행동으로 드러나고 결국 교구를 뛰어넘는 지원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얘기다.
다시 얘기하자면 내 것에 대한 강한 욕구가 낳은 정간물의 다양화는 아직 문화에 대한 의식성장이 미처 따르지 못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어쩌면 너무 이른 선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80년대 초 종교음악연구소 출범을 기점으로 문화를 주인으로 한 연구소ㆍ연구원등이 생겨난 것도 간과할 수 없는 80년대 현상이었다. 「가톨릭 사회과학 연구회」「가톨릭 문화연구원」「가톨릭 문화성양회」「성지연구원」등 제 기관단체들의 출현은 문화에 대한 빈곤한 의식 속에서도 손꼽을 수 있는 80년대 결실이었다.
이들 기관단체들은 교회중심부에서 제도적으로 마련한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활동의 산물이라는 점이 특징.
따라서 의욕이 뒷받침되고 목적이 분명한 시작이었음에도 불구、 관심 있는 사람들의「소극적 참여에 의한 소극적 결실」이라는 한계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한계점 속에서도 이들은 각자의 개성과 특징을 최대로 살리는 의욕적인 활동으로 교회의 문화적 접근에 새로운 활력소를 제공했다. 교회사 연구、 성지개발과 보존 등을 비롯, 토착화 연구 등은 한국문화 속에서 가톨릭시즘을 찾아보는 시도들로서 한국교회 역사와 가톨릭문화에 대한 의식변화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각 본당사ㆍ교구사ㆍ수도회사ㆍ단체사 등이 쏟아져 나온 것도 80년대였다. 기록에 소홀하고 자료보관이 서툰 우리교회가 역사기록과 자료 수집에 남다른 관심을 쏟게 된 것은 조선 교구설정 1백50주년행사와 2백주년 등 양대 행사가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음은 이미 알려진 사실.
결국 역사를 기록하고 그 기록을 남긴다는 인식의 변화는 본당 단체들의 회보간행이라는 또 다른 문화 활동 등으로 이어졌다. 이들 회보들은 정보화시대에 걸맞게 출범했지만 자료의 홍수 속에서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도 생겨났다.
80년대 또 하나의 특징은 교회 이름으로 문화 활동을 격려하는 시상제도가 여러 개 생겨났다는 점이다. 83년도「가톨릭대상」이 전국평협에 의해 제정되었고 매스컴위원회는「가톨릭가요대상」을 만들어 좋은 음악을 선정、 상을 주기 시작했다.
사랑ㆍ문화ㆍ정의 등 3개 부문으로 구성된 가톨릭대상은 척박한 문화풍토를 그대로 반영하듯 사랑 부문 외에는 적임자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87년 서울 대교구 홍보국이 제정한「가톨릭 언론인상」은 가톨릭 매스컴위원회와 공동주최형식으로 바뀌면서 언론대상ㆍ문화대상ㆍ가요대상 등 세 부문으로 확산됐다.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가요대상을 흡수한 이 시상제도는 문화부문에서 평협의 가톨릭대상과 겹치는 가운데 89년도 3개 부문 모두 수상자를 내기도했다.
동호인 모임형식으로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함께한 문화예술인 단체들의 움직임 역시 80년대는 70년대에 비해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가톨릭 문우회」「언론인회」「미술가협회」「사진가협회」등이 바로 그들. 비교적 역사가 깊은 언론인 회의 경우 외형적 활동보다는 모임 자체에 의의를 두고 자리를 마련、 신자 언론인들을 교회 안으로 모으는 구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우선 모이고 보자는 의도에 따라 신문ㆍ방송을 구분하지 않았던 언론인회는 89년 말、 가톨릭 방송인대회를 계기로 신문과 방송이 자연스럽게 분리되면서 새로운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언론인들의 복음화는 누구보다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입장에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새롭게 검토되어야한다고 관심 있는 이들은 진단하고 있다.
가톨릭 미술가들의 활동은 2백주년을 전후로 가장 적극성을 띠고 있다. 2백주년기념 국제미술전을 계기로 우리는 외국의 가톨릭 미술가들의 작품、 그것도 그들 작품의 정수만을 앉아서 관람할 수 있었고 이는 우리 가톨릭 미술인들의 창작의욕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2백주년、 성체대회가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가톨릭문우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교회가 중심이 되어 모아준 것은 아니었지만 문우회는 자발적인 만남을 통해 가톨릭신앙을 공통분모로 한 연대감을 강화시키는데 힘을 모았던 80년대였다.
여러 권으로 묶여진 문우회수상집은 공동체적인 만남의 결실이었고 이외에 개인적인 창작활동 역시 각 장르별로 왕성하게 전개되기도 했다. 80년대 가톨릭문학계의 특징이라면 지명도가 높은 작가들이 대거 가톨릭신앙에 입문했다는 사실.
이들의 입교와 관련、 가톨릭교회는 이들의 작품 활동에 심화된 가톨릭신앙이 깔릴 수 있도록 사목적 배려를 시급히 마련해야한다는 과제를 안게 됐다. 가톨릭 사진가협회는 한국교회의 3대 행사가 이어지는 80년대、 그 어느 단체 못지않게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기록과 자료에 대한 관심이 부상하면서 이들은 전문적인 작가 의식 속에 제반행사들을 필름에 담아 중요한 교회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데 큰 몫을 담당했다.
80년대에 빼놓을 수 없는 문화적 활동은 신자 개개인에 의해 시도된 다양한 공연들이었다. 그중에서도「판소리 성 김대건전」은 우리의 전통가락에 김대건 신부의 일생을 담은 작품으로 큰 관심을 끌었고 명동대성당이「판소리 성 김대건전」을 성당 내에서 공연、 문화공간으로서 교회활용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기도 했다.
80년대 교회 문화 활동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앞서 지적한대로 우선 가톨릭 문화의 개념 정립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단지 눈에 보이는 제 문화적 활동 상황들을 있는 그대로 살펴본다는 것、 특히 70년대에 비해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70년대와 단순비교를 한다면 양적인 면에서 80년대는 70년대를 앞지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80년대의 교세、 교회성장에 준할 경우 문화 분야는 왜소하다는 인상을 버릴 수가 없다. 자발적인 문화 활동 외에 교회가 의식을 갖고 투자를 하거나 지원을 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역시 언급한바 있지만 문화예술 활동을 중심으로 한 단체ㆍ기관ㆍ모임 등에 교회 지원은 전혀 없었다고 해도 지나침은 없을 것이다. 교회가 만일 외형적 성장의 폭만큼이나 문화、 예술부문에 관심을 가졌다면 이들 제 단체들의 활동의 폭은 그만큼 넓어졌을 것이고 문화라는 매체를 통한 복음화의 접근은 그만큼 쉬워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양적팽창을 거듭해온 80년대를「영성의 빈곤기」라고 부르는 현상을 따지고 보면 문화ㆍ예술에 대한 교회의 관심부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영성의 빈곤을 문화부재에 전적으로 짐 지울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양한 문화적 활동 안에 포함시킬 수 있는 교육적 의미를 감안한다면 문화적 활동을 곧 영성의 풍요로까지 연결시킬 수가 있다는 결론도 가능하다.
각 분야에 걸쳐 문화적 활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이를 교회가 적극 수요하고 지원할 때 한국교회는 문화라는 매체를 통해 이 땅에 더욱 굳건히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또는 신자들이 자신 속에 안주하지 않고 세상과 만나고 대화하기 위해선 어떤 통로가 필요하다. 가장 손쉽고 자연스런 통로 중의 하나가 바로 문화라는 통로다. 교회는 문화예술분야의 유능한 평신도들을 문화의 복음화를 위한 통로로 활용할 줄 알아야한다.
90년대 교회는 가톨릭 문화예술 활동을 관장하면서 그 관계자들을 모아들일 수 있는 구심점을 만들도록 제안하고자 한다. 교회 중심부에서 제도적으로 관장할 수 있다면 그 구심점은 어떤 형태라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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