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통해 지식은 온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인류 역사의 궁극적이고도 최후적인 의미가 밝혀지는 것과 같은 예증이다. 그러므로 인간 불행은 불행 그 자체가 아니라 헛된 고뇌와 뜻없는 고통 그 자체일 것이다. 6·25를 겪은 지도 20년, 인유사에 그 유래가 드문 전쟁의 참상을 겪고 우리는 어떤 자각에 이르렀으며 민족의 장래나 이웃의 평화를 위해 얼마만한 행동적인 모색을 가졌을까? 당시 납북된 수다한 교회 안팎의 인사 중에서도 불법 납치되었다가 다행히 생환된 한 눈 먼 이방 수녀의 체험기를 통해 우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잔악한 박해, 어떤 인간 유린에서 결국 인간의 신념과 자유와 영신적 가치는 말살할 수 없음을 거듭 느낄 뿐이다. 영하 40도의 익방의 나라 그 땅에 반생을 헌신하다 끝내 거기서 굶주림 속에 죽어간 한 늙은 성직자의 마지막 말-『이 완전한 결핍 속에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내 생애의 가장 큰 은혜입니다』물질주의의 만연으로 정신적 빈혈을 일으키는 이 시대에 이보다 더한 역설, 이보다 더한 인간정신의 승리가 또 있을까. (편집자 주).
봉쇄의 문을 등지고
27일 거리엔 포성이 울렸다. 교황대사 방 주교님이 와서 동경으로 가는 마지막 비행기가 떠나니 준비하라고 일렀을 때 데레사 원장수녀는 한국수녀가 다 갈 수 없으므로 피난을 포기한다고 했다. 7월 15일 괴뢰군에 의해 체포될 당시 5명의 외방수녀는 각기 보따리 하나씩을 들고 나서자 그것도 못 들게 했다. 붙들려 가는 등 뒤에서 한국의 어린 자매 수녀들은 울면서『어머님 어머님』불렀고 원장수녀는 돌아서서 큰 십자가를 그으며 마지막 강복을 주었다. 시내 낯선 큰 건물에는 이미 방 주교님과 비서 부 신부 유 신부 그 밖에 숱한 외국인들이 붙들려 와 방은 질식할 정도였다. 발뒤꿈치를 세우고 꿇어앉아 있는데 윗층에선 끊임없이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
어떤 수녀회 수녀와 대신학생이 신앙을 거부하지 않아 고문을 당하는 신음 소리. 가까스로 가슴 조이는 초조 속에『단도로 갈멜 수녀의 심장을 찌르고 손가락, 코, 귀를 베라』는 소리도 들렸다. 용케 이 위협은 실현되지 않고 19일 생지옥 같은 서울의 첫 현장을 떠나 기나긴 귀양의 첫 발을 디뎠다.
어느 역두에서 감시병이 그들을 착취자라고 욕하며 몰아대자 둘러선 구경꾼들이 웃어대는 가운데 짐승 싣는 화차에 실렸다. 낮은 멎고 밤에만 가는「지옥열차」는 가는 도중 비행기 폭음「도적, 강도다」하며 쏘아대는 총소리『모두 강에 빠뜨려 죽일 준비가 됐다』『누구부터 죽여? 구 신부?』라는 등 끊임없는 위협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눈치를 봐야 태연한 포로들의 표정을 보고 괴뢰군은 오히려 분통이 터지는 얼굴들이다.
21일 평양 도착, 물구덩이에 빠지며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벌판을 넘어 숙사에 이르니 불란서 공사, 부공사, 비서, 문 기자와 만나게 되어 일변 슬프고도 반갑다. 세 끼에 주먹밥 하나 이때부터 굶주림은 시작되고 맥밀드 수녀를 위시 벌써부터 많은 이가 영양 부족으로 종기를 앓는다.
임종자에게 큰 소리로「사죄경」
9월 5일 평양서 만포로 많은 다른 외국인 포로와 함께 다시 짐승 싣는 화차에 실렸는데 거기엔 750명의 미군 포로가 뚜껑 없는 석탄 화차에 타고 있었고 그들의 대부분은 다 떨어진 여름옷에 거의가 맨발이었다. 그 중 한 포로가 임종을 당해 신부를 찾았을 때 감시병이 허락하지 않아 구 주교님은 8백m나 떨어진 거리에서 임종자를 향해 큰 소리로 사죄경을 외우곤 눈물을 지었다. 팔이 없는 자 다리가 없는 자 부축을 받고 겨우 끌려가는 자 다만 죽음만을 기다리는 목불인견의 포로들-
어느 오색지구의 마을을 지날 때 구경꾼 중에 한 사람이 감시의 눈을 피해 다가와 마을에 15명의 교우가 있다고 하며 모두 성사를 보고 싶어한다고 했다. 방 주교는 그들의 위험을 생각하고 그날 밤 역을 지날 때 한데 모여 마음으로 통회하면 사죄경을 보내겠다고 했다. 몰려온 남녀노소들-노인 하나는 두려움도 없이 크게 성호를 긋고 있었다.
만포 수용소엔 여러 국적, 각기 다른 종교의 외국인이 모였다. 불란서, 애란, 영국, 미국, 호주, 서서, 오스트리아, 독일, 백계러시아, 남한 정치가와 블란서의 교관들 그리고 종교는 천주교, 성공회, 감리교, 구세군, 러시아정교회, 회교, 유태교 등이다. 12살부터 열여섯 달 애기까지 8명의 어린 것을 합쳐 74명의 동료들은 서로 형제적 인연으로 돕고 살았으나 후에 심한 고통 속엔 이기주의가 앞서기도 했다. 만포, 고산진 초산을 몇 번이나 왔다갔다. 끌려다닐 때 감시병조차 달아나기를 종용한 적이 있지만 그들을 전부 믿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날 행군 중에 임종하는 병정이 계란을 원했을 때 갈멜 원장수녀가 농가에가서 계란 3개를 겨우 구해 임종자에 주려 하자 곁에 있던 병사가 가로채어 먹어 버리고 2개째 역시 다른 병사가 먹어 버려 남은 한 개는 하는 수 없이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앓는 멕띨드 수녀께 드리기로 했다.
호랑이와 더불어「사의 행진」
고산진에서의 포로 감시 책임자는 눈물조차 짓고 푸대접에 대해 용서를 빌며 떠나가고 이때부터 호랑이 사령관을 만났다. 불란서 공사는 병자와 노인 어린이를 위해 무엇이든 태워 달라고 청하자『명령이다. 죽든 걷든 하나를 택해라』하여 이때부터「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호랑이는『낙오자를 내지 말라 병자와 시체까지도 가져와야 한다』고 외쳤다. 포로는 여러 부대로 나누어져 있었고 낙오자가 속출하자 살 가망이 없는 자를 끌고 갈 수 없어 두고 가자 호랑이는 명령을 어겼다고 여기서 책임자 포로들을 총살했다.
이때 토이기 아가씨와 통역이 울면서 애걸하자 그들까지 죽이겠다고 호령했다.
이때 갈멜 수녀들은 다 여름 산달이 아니면 나막신을 신고 있었다. 꽁꽁 언 절벽 준령을 넘으며 추위와 허기로 비틀거리자 뒤에서 감시병들의 총대는 짐승 몰 듯 찌르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멕띨드 수녀는 다른 두 수녀의 부축을 받으며 목적지까지 있는 힘을 다 냈고 핸 신부와 성공회 부주교님은 신경통으로 한 걸음 내딛기에 영웅적인 용기가 필요했고 성공회 수녀원장의 허리를 꺾어 붙이고 기다시피 가는 참담한 모습! 거대하신 우 신부를 부축한 뷜또 신부님은 너무 지쳐 끝내 회복 못했으며 벨라뎃다 수녀는 등에 무거운 짐을 진 채 눈 먼 수녀를 부축하여 걸었다.
80 노인 수녀 위해 물 한 그릇 못 얻고
11월 1일 어느 촌락에서 옥수수를 조금 먹고 묵었는데 멕띨드 수녀는『내 옆구리가 얼어 들어오니 내 곁에 좀 가까이 오라』했으나 모두가 얼어 있었으니 무슨 도리가 있으랴. 으제니 수녀는 자기네 원장수녀께 드리려고 어떤 집에 가서 77세 난 노인을 위해 더운 물 한 그릇을 구걸했으나 거절 당했는데 거긴 공산주의 집회소였다. 가마니는 포로들에게 귀중한 것이었으나 모두들 길에 버렸고 수녀들은 띠에 걸린 묵주마저 무거워 모아서 길에 파묻고 갔다. 산비밭에 즐비하게 쓰러져 누워 있는 포로들. 아직도 숨어 있는 이들을 호랑이는 기관총으로 한 방씩 쏘아 떠러지에 발로 차 넣었다. 거의 백여 명이 이 산 가운데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 밤 늦게 도착한 숙소에선 발뒤꿈치를 세우고 기나긴 호랑이의 강연이 시작되었다. 11월 3일 심장병이 난 베아뜨릭스 원장수녀가 드디어 주저앉고 말았다. 감시병의 독촉은 성화 같다. 그는 온화하게『이제 더는 못 가겠습니다』하고는 평온한 태도로 동료 수녀에게『수녀님 떠나십시오. 순명의 덕으로 명합니다. 떠나가십시오』했다. 많은 고아를 기르던 그 노고 그 자애 깊은 시선, 어진 미소로 사도직의 아름다운 최후를 마쳤다. 소달구지가 왔으나 다투어 타는 바람에 멕띨도 수녀는 사력을 다해 병든 몸을 끌었다. 어른들을 떨어지지 않으려 달음질 치는 어린 것들 토이기 부인과 백계로시아 부인은 배 고파 우는 어린 것을 등에 업고 끈질기게 준령을 넘어간다.
방 주교, 원장수녀의 최후
다음 수용소에선 매일 반 시간씩 운동장에 체조하러 나가야 했다. 우 신부님은 임종을 시작하여 못 나가자 호랑이가 노발대발하여 신부님들이 그를 가마니에 눕혀 들고 나갔다.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드디어 숨을 거두며『오 천주여 죽기 위해 얼마나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했다.
앞서 이미 성공회 글라라 원장수녀도 죽고 12일은 깔멜 지도 공 신부님에게 죽음의 차례가 왔다.
데레사 수녀원장은 임종 곁에서 신부님이 천당에 가서 모든 이를 위해 천주께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고 그의 동생 신부는 슬픔을 걷잡을 수 없이 흐느끼며『형님 천당에 가시면 우리들이 잘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청하시고 빨리 저를 부르려 오십시오…불란서 공사가 왔습니다. 불란서를 보는 것 같지요』이튿날 동생 공 신부님도 형님을 따라 복되시게 떠났다.
깔멜 설립자 멕띨드 수녀는 드디어 수련장께『나는 가다 길에서 죽을 것입니다』한족 수련장 역시『할머니 저도 더 걷지 못하겠습니다』고 했다. 멕띨드 수녀는『혹시 다시 우리 아이들을 만나거든 내가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 마음으로 축복을 보낸다고 전해 주오』이것이 최후의 말이었다고 열이 난 데레사 원장수녀는 소금조차 없는 깡조밥을 도저히 먹을 수 없던 어느날 때가 되었다고 하고는 서울에 가면 어떻게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똑똑한 발음으로 강복을 준 후 숨졌다.
이 두 분 수녀의 죽음 사이에 방 주교의 장례도 치뤘다.
감시병들은 안포에서부터는 외교관 취급을 하려 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겸손되이 신부들과 같이 행동하였다.
언제나 인자하고 쾌활하여 모든 일을 기쁘게 했다.
하늘이 보이는 지붕, 갖다드릴 거라고는 옥수수죽뿐 이런 가운데 주교님은 임종하시며『내가 메리놀회에서 받은 수도사제 허원의 은혜 다음에는 이와 같은 완전한 결핍증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은혜입니다』고 말했다.
12년 간(평양교구장) 이방을 위해 전교하다가 그 땅에서 박해 받아 거룩한 최후를 마쳤다. 옛날 장교로 항상 씩씩하던 가스발(강) 신부는 치료못한 상처가 곪고 썩어 숨졌고 갈라반 신부도 이어 숨졌다.
마늘 한 뿌리로 차린 즐거운 성탄 만찬
성탄을 기다리는 희망으로 세월을 보냈다. 마침내 24일 저녁은 가톨릭 프로테스탄 영국 불란서 사람 할 것 없이 한 자리에 모여 축가를 부를 허가를 얻었다. 이 국도의 궁핍 중에도 적은 것으로 기쁨을 창조했으니 요리의 명수인 벨라뎃다 수녀가 어디서 마늘 한 통을 주워 와 축하 요리를 만들었는데 그 맛이란 일생을 두고 남을 진미였다. 정월 초하루엔 쌀밥과 고깃국과 호콩을 주니 어쩐 영문인지 모르겠다.
대구교구에 있던 빌또 신부의 별세가 이 참혹한「죽음의 도문」의 끝이 되었고 약 1년 후 또 세 사람이 죽어 도합 19명, 즉 전원의 4분의 1이 이 땅에 파묻혔다. 묘를 팔 때마다 영하 40도의 추위에도 구 주교님은 빠지지 않았고 감시병이 호령하는데도 망자를 위해 경문을 다 염하지 않고는 돌아서지 않았다. 방 주교님의 죽음을 가장 애통해한 부 신부는 동창이 났고 구(꼬요스) 신부는 의사가『내일은 운명한다』고 했는데도 소생했는데 으제니 수녀의 헌신적 간호는 영하 40도의 추위에 병자를 위해 깨진 옹배기를 들고 빨래를 갔다.
매일 아침 죽어 나오는 4·5명의 포로 시체는 양손을 붙들어 매서 긴 장대에 꿰어 갖다 버렸다. 여름 양복 저고리만 걸치고 아랫도리를 다 벗고 비틀거리며 변소에 가는 미군 포로들, 토이기 부인은『저 다리는 여섯 살 난 우리 애 다리보다 못하구나』하며 울었다. 이런 가운데도 괴뢰군은 공산주의 이론은 가르쳤다.
포로들 매 맞고 욕 먹은 설움 수녀에 호소
수녀들은 저녁밥을 절반 남겼다가 미군 포로에게 주면 그들은 모자나 세수 수건에다 받았다. 그들은 일하고 돌아올 때 감시병의 눈을 피해 욕 먹고 매 맞은 설움을 그들 옆에 와서 위로 받고 다시 용기를 얻었다. 신부들은 가끔 포로 장교 방에 비밀히 들어가 강론도 하여 개종자가 생겼고 성사를 주는 기쁨도 가졌다.
만포에서 귀양생활 중에 두 번째의 성탄도 맞고 정월에는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로시아 토이기 두 가족의 어린이에게 수녀들은 공부를 가르쳤다. 이들 가족은 나무를 해다가 장에 내다 팔아 아이들을 위해 음식을 좀 살 수 있었다. 토이기 처녀 사끼다 아가씨는 선생수녀 본명 첨례날 계란을 바른 빵을 선물했는데 그 빵은 어디서 났을까?
성 금요일에 빵 천 개가 도착했는데 쌀과 달라서 썩는다고 매일 달라는 것을 안 주더니 38가마 중 6가마만 먹고 나머지는 죄다 썩어서 버렸다. 후창에서의 수용소 생활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행했다.
매달 중공군이 말방울소리를 내며 쌀 밀가루 야채 옷가지를 싣고 오면 아이들은 환성을 질렀다. 처음 포로생활을 시작할 땐 모두 예의를 지키고 서로 존경했으나 시련의 2년 반을 지내고 나니 결국 인간의 비참과 미약함을 할 수 없이 드러냈다.
감옥의 태양 구 주교
지금까지 당한 고통의 반동으로 더한 쾌락을 취하려는 반면 고통으로 인해 진보하며 순결해지는 이도 있었다. 스위스인 하나는『우리들은 이곳에 우리 양심을 보존하며 영성적 가치를 알아듣기 위해 온 것이다』고 선언했다.
구 주교님은 그 거대한 몸집으로 항상 겸손되이 그 주위에 사랑을 반사했다.
힘든 노동일은 항상 앞장서 봉사로써 설교를 살았다. 53년 3월 수용소를 떠날 때 모두 어버이를 잃은 듯 슬퍼하며 감옥의 태양이 사라진 듯했다.
3월 27일 佛人만 떠나게 되었다. 사끼다 어머니는 닭 두 마리를 잡고 올가 어머니는 선생수녀의 얼굴과 손을 쓰다듬으며 울먹인다.
3월 27일 폭격으로 페허가 된 평앙에 도착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데 부대의 군인은 수수밥에 국뿐이었다.「죽음의 행진」동안 죽은 포로들 때문에 문제가 까다로워져 심문은 좀처럼 끝장이 나지 않았다.
포로생활 중 후대에 대한 김일성에의 감사장도 쏘고 4월 15일 드디어 석방은 되었으나 그리던 서울이 아닌「모스크바」를 경유 본국으로 송환한다는 것이다. 압록강 다리를 건널 땐 하창리 두 무덤을 바라기구하며 서울의 딸들을 향해 축복을 보냈다. 본국 외무성에선 고생하고 풀려 나오는 자녀를 위해 마음껏 여행을 즐길 비용을 보냈다.
「모스코바」엔 주소대사를 비롯 불란서 사람은 다 모여 열광적인 환영을 했다.「빠리」비행장엔 환영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관구장 신부님 공사와 그 부인과 아이들의 눈물겨운 포옹「몽마르뜨르」쇄문에서 신부님은『오늘 저녁 대침묵을 관면드립니다』했다. 무엇보다 한국 딸들의 편지, 모두 무사하다니…아! 이것은 정녕 꿈이 아니구나.
오! 서울의 하늘
지겹던 15일 간의 일본 체류를 거쳐 일로부산으로! 얼마나 기막힌 감격으로 한국땅을 거닐고 있는 것일까!『서울의 하늘이여, 나 언제나 너를 다시 보리』노래했더니 보라 오늘 그는 우리를 맞아들이지 않는가! 우뢰 같은 박수 소리. 우렁차게 퍼지는 치명 복자찬가 소리! 1839년에서 1866년 말까지 순교한 치명 무리 속에 우리의 두 어머니도 끼워드리며 이 환영의 치명 노래와 만세를 실어 보낸다. 열광하는 교우들에게 일일이 답례할 사이도 없이 고대하던 봉쇄의 문은 열리고 우리는 우리의 딸을 포옹한다.『복된 사람에게는 이야기할 재료가 없는 법이다. 지금 우리는 가장 복된 처지에 있으므로 이야기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필자들의 近頃「깔멜 수녀들의 북한 납치기」-(제르뜨르다)
-빈부 차 없애고 통일만이 소원 방 주교 원장수녀 무덤 못 잊고
철창을 통해 현 원장수녀님과 이야기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허리가 구부정한 두 늙은 수녀님들이 들어오신다.
검은 안경을 끼고 있는 자비의 성녀 마리아.마드랜느 수녀(당시 수련장)께서 성모통고의마리 앙리에뜨 수녀님과 손을 잡고 들어오시며 철창 앞에 자리 잡고 앉으신다.
이 책속에 씌어있었듯 이 이들은 참으로 지상의 고락을 영원토록 같이 할 떨어질 수 없는 한쌍의 할미새라고 느껴졌다. 33개월의 긴 유형의 나그네길 끝에 그들은 가는 곳마다 개선장군처럼 환영을 받았다고 했다.『불란서「롱마르뜨르」수녀원에 이르렀을 때「피로할테니 새 옷을랑 내일 입으시지요」하는 수녀님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 기뻐서 그자리에서 당장 줏어입었지요』라고 하면서 애기처럼 춤추는 시늉을 하시는 앙리엣뜨수 녀님의 눈은 많은 연동과 수다한 고통을 격고도 여전히 맑고 명랑하기만 하다.
『6개월간의 휴양중에도 우리는 하루같이 우리 사랑하는 딸들이 살고있는 한국으로 빨리가고 싶어요』54년 1월 29일 다시 서울에 도착했을 당시의 감격을 회상했다. 도착하면 1주일간은 매일 그동안의 이야기를 했다니 이들은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으리라.
『지금은 거의다 잊었지만 다만 잊을 수 없는 것은 압록강 북쪽에 묻고 온 두 어머니의 무덤과 방 주교님의 무덤만이 생각납니다』
이 두 수녀님이 현재 맏고 있는 일은 주로 외국서 오는 편지 번역인 데마드렌느 수녀님은『나도 72살인데 이제 우리를 빨리 천주님께서 불러주셨으면 좋겠다』고 하시며 두 분이 손을 꼭 마주잡으신다. 귀와 눈이 아주 밝아 지금도 많은 일을 하신다.
우리나라 교우들에게 하고싶은 말씀은-. 될 수 있는대로 통일이 되어 빨리평화롭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고.『「현재 우리나라엔 빈부의 차이가 너무 심한데 이것은 결코 정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공산당을 맞이하는 요인이되므로 노동자들을 보호해주고 모든 국민이 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때가 하루속히 왔으면 좋겠읍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