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 첫째 원인은 일반 사회의 공통된 용어에 관습적으로 젖어들게 된 것인데 하나의 실례로서「주일」을 일요일이라고 한다는 것부터 신자로서의 주체성을 망각하고 주일과 일요일 자체가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에 무작정 주일을 일요일로 사용하고 둘째 설사 일요일이 본래의 주일이라는 것을 명백히 아는 사람도 직장이나 어떤 모임에서 막상 주일이라 하고 싶어도 그 중에는 신자가 자기 한 사람뿐이기 때문에 주일이라는 말을 써 봐야 잘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삼가는 사람 셋째로 다수에 의해 소수의 신자가 위축되는 데서 오는 패배감 때문에 넷째는 출판물을 통해 익혀온 말들이 우리 교회의 고유한 용어가 아닌 불교식 또는 프로테스탄식으로 적용됐기 때문에 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느 주일학교 교사나 중고등학생「쎌」지도자가 교회 용어를 자주 써가면서 그에 대한 아무런 해석도 없이 넘어가면 무슨 말을 듣는지조차 모르는 학생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일일이 일반 사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말과 병용해서 말하거나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결과와 이를 시정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매스미디어의 적절한 활용밖에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사회는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매스미디어로 가고 매스미디어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엔 텔레비를 제외하고 방속국은 웬만한 도시면 없는 곳이 없다시피 돼 있다. 그리고 그 중에는 국영 민영이 있고 민영방송국 중엔「기독교 방송국」이 다른 방송국을 누를 듯이 퍼져가고 있다.
이 기독교 방송을 통해서 그네들의 교회 용어는 얼마나 많이 흘러나오는가?
그리고 이 나라 사회에 비화의 영향은 어떻게 미치고 있는가를 보자. 한마디로 말해서 80~90%는 그 교회의 용어로 쉽사리 일반 사회나 특수사회에서 기반 없이 통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실예로는 나의 조카를 든다. 국민학교 2학년이다. 지난해 성탄 때<교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는데 프로테스탄에서 부르는 가사로 부르고 있었었다.
물어본 결과 모두가 라디오에서 배웠다는 것이었다.
또 한 가지 실예로서 내가 군에 복무 당시 대구 육군병원에 장기간 입원하고 있을 때였다.
대구 파띠마 수녀원의 수녀님 두 분이 일주일에 약 두 번씩 병원 환자를 위문했는데 그 수녀님들을 보고 상당수가「숙녀」라고 불렀고 주일날 이사를 드리러 오는 신부님을「목사」라고 불렀다.
이런 것들은 수적으로 신부보다 목사가 많은 탓도 있겠지만 잘못 전해진 경우가 많고 일반 대화에서 신부나 수녀의 용어를 쓰기를 꺼려한 데 기인하며 특히 의인 지성인(문필가) 중에서는 주교나 성당을 「승려」나「사원(寺院)」으로 거침없이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혹자는 구라파의 천주교는 중(僧)도 있고 절도 있는 줄 착각하게 된다.
그만큼 우리 가톨릭은 사회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고 심지어 많은 의인 지성인들이 우리를 가리켜 보수파니「도그마」에 빠졌느니 하여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옛날 것만 고수하고 있다고 평을 하지 않는가.
이렇게 볼 때 우리 모두가 현대 과학 문명을 최대로 활용치 못하고 내 것만 제일이라는 식으로 비단 보자기에 꽁꽁 싸놓은 족보처럼「우리만의교회」였다. 그러기에 지금도 한 직장에 몇 년을 같이 근무하면서도 그 사람이 가톨릭 신자인지조차 모르고 지낸다니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허구 많은 방송국이 있고 국영방송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종교시간도 각 교구별로 한 달에 겨우 한 번 정도의 방송을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딱한 일인가. 그나마도 요새 말로「폼」으로 놔두고 있는 실정이니 한심스럽다 아니할 수 없다. 어느 신부님은 일요일날 늦잠 자기 바쁜 사람들이 누가 그런 딱딱한 소릴 들으려 하겠느냐고 한다.
매주 듣고 있는 종교시간은 참으로 인생독본이요 낙원처럼 애청해야겠는데 유독 우리만은 딱딱해야 하니 우리네 출판물 보급주일은 정말「폼」으로 놔둔 게 틀림없겠다.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우리가 제일이라 할 수 있겠으며「공용어 심의위원회」에서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다 한들 교회 출판물에도 잘 발표하지 않으니 누가 언제 베두로를「베드로」로 요왕을「요한」으로 고친 줄 알겠는가. 이제는 자기의 본명까지도 바뀐 줄 모르고 지내야 하니 가히 우리네 메스미디어는 알 만하다 않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하루 빨리 매스미디어에 해당하는 모든 단체를 동원해서 방송국 하나쯤은 세워야겠고 각 분당은 매주마다 프린트로 된 주보라도 배부하고 각 지방 방송을 최대한 이용해서 가톨릭 공동어의 일반화와 위치를 굳히고 침식되려는 용어를 재정비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함은 나 하나만의 영원은 아닐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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