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가 문화촌 종점에서 버스를 내린 것은 오후 네 시쯤이다.
미사는 손에 들고 온 쪽지에 그려진 약도를 따라 좁다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미사는 지금 예관수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어쩌면 지금쯤은 주동숙을 찾지 못하고 돌아온 피곤한 몸을 산 중턱에 마련한 그의 무허가 부로크집에 뉘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유 박사의 말이 미사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유 박사를 통해 들은 그의 이야기는 어떤 선명한 감명으로 미사 가슴에 새겨졌다.
듣기에 따라서는 삼각관계에 휘말린 사나이의 어처구니없는 수난사(受難史)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사로서는 그렇게 엽기적 흥미로 단순히 생각할 수는 없었다.
예관수는 사태진의 협박과 공갈에 대응할 아무런 힘과 조건이 없었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는 있다.
그는 사랑에 헌신하기로 아예 결심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은 비단 주동숙에 대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딸인 은애를 합쳐 하물며는 사태진이 까지를…
그는 자기 자신을 시험대로 삼았던 것이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무조건 줌으로써 병든 영혼, 불안한 영혼에 한줌의 희망이 되고자 한게 아닐까.
미사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자신을 남에게 조건없이 내던져줌으로써 기필 그들이 언젠가는 소유하게 될지도 모를 「그 무엇」에 목숨을 건 사나이…
미사는 그의 모습이나마 살아있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그의 앙상한 손길로 자신의 황폐한 허무를 위로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피땀으로 얻은 얼마 안되는 재산을 모조리 사태진에 의해 탕진해버리고 지금은 인왕산 막바지에 한 뼘쯤 되는 땅에다 우로를 막는 무허가 집을 손수지어 그곳에서 산다는 것이다.
평지에서 못살고 밀려난 무허가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길은 가파로왔으나 그래도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집념 같은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있었다.
미사는 문득 어느 외국 사람이 쓴 성지순례 기행문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빌라도의 집을 출발하여 골고다 언덕을 걸어 올라간 그 도정에 관한 것이었다.
십자가의 무게는 오늘날 사가들이 증언하는 바에 의하면 적어도 70킬로는 되었다니 거의 어른 한사람을 짊어진 무게란 한다.
이러한 십자가를 지고 빌라도의 집에서 골고다 언덕까지 약 4백 미터의 거리를 올라가야 했다는 것인데 미사의 머리에 십자가를 짊어진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떠오른 것은 반드시 우연한 연상만도 아니었다.
어쩐지 그 언덕길은 골고다로 향하는 길 같기만 하다.
실제로 지금 남아있는 골고다 언덕은 흔히 상상할 만큼 가파롭지는 않다고 하지만 역시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골고다 언덕은 험하고도 가파로운게 아닐까.
미사는 모든 것을 빼앗긴, 아니 넘겨준 예관수가 천근이나 되도록 무겁게 느껴지는 병든 몸을 이끌고 이 깎아지른 것 같은 언덕을 기어 올라가던 모습이 눈앞에 선명했다.
그는 가끔 발걸음을 멈추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으리라.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의 가슴은 주동숙을 향해 은애를 향해, 그리고 사태진에게까지 따뜻하고 부드럽게 열려있었던게 아닐까.
미사는 숨을 몰아쉬면서 언덕받이를 올라가고 있는 자신의 발걸음이 예관수의 그것위에 포개져 이어지고 있다는 어떤 상념을 감출길이 없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가슴속 깊은 곳에서 저주와 보복의 칼날을 갈고있던 이성근의 아픔이 비로소 자신의 것으로 아프게 번져오는 것을 느꼈다.
이성근을 위해 명복을 빌고싶은 마음이 그가 죽은 지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따뜻히 되어 오는 것이 스스로 믿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그의 집 앞으로 왔다.
부엌을 중간에 두고 양 쪽으로 두 개의 방을 거느리고 있는 그 무허가집 왼편방문이 열리며 해소병을 앓는 듯한 할머니가 고개를 내어 밀었다.
찾아온 용건을 말하자 노파는 심한 기침 사이사이로 간신히 이렇게 전해 주었다.
우리 선상님은 아직 안오셨구먼유 설악산엔 가셨구먼유. 아마 거기서 누가 죽었다지요…지금 설악산엔 눈이 쌓여서 죽은 사람을 찾지 못한다는데…아이구 없어진 사람 그렇게 정성들여 찾아서 뭣하려는 건지…누군지 몰라도 죽은 송장만이나마 한은 없을 거외다』
미사는 발길을 돌릴수 밖에 없었다.
밀집한 빌딩의 서울이 발아래로 굽어다 보인다.
이 높은 곳은 공기만은 다시 없이 맑았다.
이곳에서 맒은 공기를 마시면서 예관수는 건강을 회복해 주어야만 하겠다고 미사는 생각했다.
『이번엔 저를 위해서 건강해 주셔요!』
미사는 마음속으로 곁에 그가 서있기라도 한 듯이 속삭였다.
때마침 저녁놀이 눈부셨다.
아름다운 후광을 지으며 여기까지 뻗치는 놀빛은 이 살벌한 언덕받이를 사뭇 휘황하게 물들인다.
올리브산을 물들인 성지의 놀처럼 그것은 미사의 가슴에 투사하는 소망의 한줄기 빛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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