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를 돌아보다 언덕 빈 자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가슴 속이 뜨거워오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기쁨!
『저것이 바로 그분의 자리다! 그분은 우리 사이에 계시다. 이 미숑의 화요일회는 성 목요일과 같은 것…』
피에르는 행복했다. 맑은 눈동자를 한 이 사제들, 자기나 마찬가지로 걱정에 싸인 이마, 거친 손을 한 이들과 말없이 맺어진 굳은 유대를 느끼며 그는 행복했다. 그들은 제각기 또 다시 자기 일터로 떠날 것이다. 그러나 결코 서로 헤어지는 것은 아니다.
피에르는 베르나르를 생각했다. 혹시 누가 그의 소식이라도 들었는지 궁금했다.
『베르나르의 편지를 받았소. 잘 있다고 당신 소식을 묻더군…』
앙드레 신부가 대답했다.
피에르는 속으로 생각했다.
『왜 내겐 편지를 하지 않았을까? 나한테나 마드레느한테?』
그는 섭섭하면서 동시에 마음이 놓였다.
『앙드레 신부에게 편지는 했지만 기구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할 거야. 우리한테 소식은 전하지 않지만 우리의 소식은 알고 싶어하니…』
회합이 끝났다. 모두 일어나 함께 기구를 했다. 담배를 한 대씩 피우고는 제각기 자기 길로 떠났다 몇몇 노동사제는 포장이 잘 되 있지 않은 길로 걸아가야 했다.
한결같이 이 거대한 외곽지대로 그들은 향하고 있다. 죽은 나무가 서 있는 길, 연기가 자욱한 선술집, 창문이 즐비한 거리, 기차 선로와 운하(運河)가 가로질러 가는 마을, 공장과 개스 탱크와 낮은 집들이 들어선 지대…이곳은 화려한「빠리」를 둘러싸고 있는 서글픈 외곽지대다.
다른 사제들은 가난한 왕국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그들은 이 낯선 커다란 도시를 건너지르고 있다. 그 정원들 부자촌 오페라 대성당이 있는 밑을 일순간 그들이 탄 지하철은 폭음을 내며 지나갔다.
⑥ 남을 위한 사제
반코트를 걸친 국민학교 학생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피에르는 불현듯 에띠엔느가 보고 싶어졌다. 그는 교문 앞에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길 건너편 가로수에 기대 서서 어린 학생들이 재잘거리며 쏟아져 나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학생들은 떼를 지어 교문을 나온다. 밖에 나와서까지 서로 밀고 당기며 장난질이다.
그리고는 한길을 아래 위로 훑어보고 뛰어간다. 어린애가 교문에 발을 멈춘 채 멍하니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피에르는 자기들의 비밀 신호인 휘파람을 불었다.
에띠엔느가 고개를 홱 돌린다. 그 눈동자에 태양이 솟듯 기쁨이 활짝 피어올랐다.
『지금 바로 신부님 생각을 하고 있던 길인데!』
『그래?』
『뭣 때문에 산수, 역사 같은 것 가르치는지 몰라… 그런것 신부님도 한 번도 써먹는 일 없지 않아요. 아버지도 그렇고…아무한테도 소용 없는 것을. 』
『너한텐 아마 장차 소용이 있겠지. 그런데 이리 좀 돌려 봐라. 볼따귀니에 멍이 들었구나?』
『얻어 맞었어』
『널 때렸어? 아버지가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가서…』
『어떻게 할래요?』
에띠엔느가 빤히 쳐다보며 반문한다.
슬픔이 깃든 깊은 바다 같은 두 눈, 꼭 다문 입술, 어른 같은 턱, 이 모든 것을 피에르는 견딜 수 있으나 멍든 볼따구니만은 참을 수 없다.
『너의 아버지한테 따지겠다. 필요하면 한 대 때려 주지!』
『그럼 매일 밤 와야 할 걸』
에띠엔느는 고개를 돌리고 빠른 걸음으로 피에르를 앞질러 가며 중얼거린다.
『내버려 두라니까… 나 하는 대로 내버려둬야 해요… 나도 알아서 할 테니까…』
『이 친구 자네가 뭘 안단 말이야?』
피에르는 어른한테 말하듯 묻는다.
『내일이니까 참견 말아요!』
『오늘은 나한테 무척 뚝뚝하구나』
에띠엔느는 애원하는 듯한 눈초리를 돌린다.
『글쎄 신부님은 다 망쳐 놓고 말 거여요. 아무 소리도 말어요. 더 물어보지도 말고!
한마디만 더「친구」라고 부르면 에띠엔느는 다 얘기할 것이다. 그러나 피에르는 그 이상 물어 보지 않았다.
그들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거리에는 고양이들의 싸움이 벌어져 있었다. 고양이는 저희들끼리 싸우고 애들은 그 뒤를 쫓고 어른들은 애들 뒤를 쫓고… 앙리가 창문을 활짝 열어제친다.
『투우장 같군! 피에르, 잠깐 들어오게』
『에띠엔느, 이따 만나자. 그리고 나하고 의논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결정을 내리면 안 돼! 』
앙리의 방안 벽에는 스타린의 초상화 각 걸려 있다. 한국 지도와 인도지나 지도가 있고 당의 선언문과 피카소의 비둘기 그림도 걸려 있다. 피에르는 무너져 가는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바로 앞에 그릇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화덕이 놓여 있고 창문 옆에는 반쯤 헐은 옷장의 문이 열려 있다.
테이블 위에 선전 비라가 잔뜩 쌓여 있고 그 한가운데 사기로 만든 코끼리가 놓여 있다.
『그 코끼리 재미있게 생겼군』
『그놈 얘긴 하지 말게!』
앙리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한다. 어느 누구의 생활에나 묘한 비밀은 있는 모양…
『그저께 명단을 가져 가게 했네. 생각해 보니까 자네 말이 옳은 것 같아서 손잡고 일할 수 있을 것 같아. 조건부로…』
『손잡고 일할 수 있지. 다만 무조건이라야. 』
『그래.』
앙리가 무뚝뚝하게 대답한다. 한참 후에 다시 입을 열고
『피에르 자네는 거센 사람이야. 차라리 그게 좋지만 』한다.
『천만에 난 온순한 사람이지 그런데 당신네들은 언제나 온순한 약자로 혼동하거든.』
『자네야 아주 강하지 요전날 저녁에 사람들을 미소 하나로 자기 편을 만들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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