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가톨릭의 숙원이 이제 실현 - 한공렬(가톨릭대학장)
가톨릭시보가 주간으로 발행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 한국 가톨릭의 숙원(宿願)의 하나가 실현된 기쁜소식이 아닐 수 없읍니다.
「타블로이드」판의 격주간도 어려웠던 것이 이제는 제법 대형(大型)의 체제를 갖출뿐 아니라 매주 나오게 된다니 대견합니다.
천주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하여 교회로서는 시자들로 하여금 한주일에 적어도 한번은 교회에 나오게 하는 것이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이유인 것과 마찬가지로 한주일에 적어도 한번은 우리나라의 교회와 전세계의 교회와 접촉할 기회를 주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주보(週報)가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새 체제를 갖춘 주보를 드려다 보며 느끼는 것은 이제야말로 살아있는 가톨릭이 대중의 손에 가볍게 손쉽게 그리고 빨리 파고들어가 그들의 주말(週末)의 여가를 천주님과 교회 안에서 고요히 즐기게 만드는구나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느끼는 바는 그 많은 지면을 채우느라고 수고하는 분들이 남모르게 얼마나 출혈(出血)을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한 사람인 나로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그러첨 수고하여 보내주시는 고마운 분들을 생각하여서라도 위선 내가 이 주보를 꼬박꼬박 애독하고 또 다른 이들로 하여금 읽게하여야 되겠다는 것을 적절히 느낌니다.
■ 가톨릭 언론에 부침 - 전창기
가톨릭언론(言論)이라하여도 여기서 말하고저 하는 것은 신문의 성질을 띄고있는 「가톨릭시보」를 중심으로 한다.
신문의 사명이 시사(時事)의 신속한 보도와 세론(世論)의 정당한 형성이라고 하면 가톨릭적인 언론 특히 가톨릭신문의 내용이 자연적으로 규정된다고 볼 수 있다. 교회내외 주요한 결정과 교회내에서 행하여지는 여러가지 활동을 때를 놓치지 않고 보도한다는 것은 재론(再論)을 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문이나 기타 언론을 형성하는 사명을 띈 출판물이 다른 출판물과 상이(相異)한 점이 있다면 역시 그 하나는 그것이 갖이고 있는 사회적 성격과 「매스콤」이 지니는 성질에서 자연히 교회 또는 일반사회의 여러가지 생활현상(現像)을 가톨릭적 입장에서 관찰하고 판단하는 선구적(先驅的)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교리적 문제나 가톨릭적 원리(原理)에 입각한 전문적인 연구는 언론과는 별(別) 것이고 언론이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대중적 의사(意思) 형성을 의미하느니만큼 원리에 입각한 사회활동의 비판이라는 것을 주안(主眼)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가톨릭언론도 일반언론과 같이 공통적 자장(磁場)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가톨릭언론이 다른 일반사회언론과 공통된 자장(磁場)을 갖이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가톨릭언론에 종사하는 사람의 큰 애로를 만들고 있다.
가톨릭적 사회관(社會觀)의 대부분이 자연법(自硏法)에 의거하고 있고 사회정의(正義)의 척도(尺度)가 대부분은 인간의 양심(良心)에 기준이 있고 이상 특이한 가톨릭적 언론을 형성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톨릭언론이 일반 언론과 전연 다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관념은 가톨릭신문의 맹점(盲点)이 될 수 있고 이는 언론 자체(自體)의 생명의 온기(溫氣)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산아제한(産兒制限) 문제와 같이 사회의 큰 관심사인 동시에 일상생활에서 항상 문제화 되늰 문제로 가톨릭적 윤리관(倫理觀)이 사회의 그릇된 사고(思考)와 정면으로 충돌이 되어 이를 크게 언론에서 취급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것은 그렇게 많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근에 특히 사회문제의 초점을 이루고 있는 것은 얼마던지 있다고 본다.
일간(日刊) 신문의 허다한 보도자료가 가톨릭언론의 논란(論難)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는 없다 여성(女性)의 사회적 지위와 그에 따르는 과도적폐단(過度的廢端) 실정법상(實定法上)의 종종의 모순, 노동(勞動)운동과 근로자의 권익의 수호, 민족자본의 조성과 분배의 공정(公正)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실용주의(實用主義) 사상에 입각한 교육사조(思潮)의 직수입(直輸入)과 국내교육의 동향 특히 교육기술(技術) 원조와 그것이 주고있는 영향 등등 일일히 자거(仔擧)하지 않아도 가톨릭자로서 사회의 정의(正義)와 건전한 윤리(倫理)로 사회구성의 원동력이 되는 정신적인 유대를 언론에서 취급할 수 있다고 본다.
진리와 정의를 사랑하는 가톨릭자라면 특히 그의 대중의 대변자로서의 언론인이라면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더욱 예민하지 않을 수 없다.
교황 성하의 교서(敎書)나 교황청의 어떠한 결정 주교(主敎)회의의 결의, 권위있는 단체의 활동 등은 우리의 신앙과 인류사회의 지상(至上)의 규범(規範)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알려야 하며 세계 각지에서 움직이고 있는 신자들의 활동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교훈을 주기에 뉴스의 제1위적 가치가 있지만 우리 신변의 일상생활을 천주의 뜻대로 이루기 위하여 고도(高度)로 복급화한 현대사회에서 바르고 정당한 판단과 지침(指針)을 친절히 제시(提示)한다는 것은 너무나 중대한 임무이다.
■ 정치성을 초월한 순수한 종교신문으로 - 박양운(소신학교 교장)
가톨릭시보가 월2회 간에서 주간으로 발전함에 즈음하여 그 앞날을 축원하여 마지않는다.
한국가톨릭교세(敎勢)가 급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가톨릭언론의 역할도 더욱 커져간다고 하겠다. 빈번한 교회의 지령(指令)과 폭주하는 교회소식을 신속하게 신자들에게 전하여주므로 일층 신자생활을 올바르게 지도해주고 또 인근 교회의 소식과 경험을 자극삼아 신자들에게 전교열을 북돋아 주기 위하여는 월간지만 가지고는 도저히 부족하고 적어도 주간신문 정도는 꼭 필요할줄 믿는다. 이미 선진국가에서도 일간신문보다 더 내용이 충실한 주간신문이 가톨릭 문서전도(文書傳道)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가령 미국의 「레지시터」(The Register) 주간지와 영국의 「가톨릭 헤랄드)(Catholic Herald)와 「가톨릭 유니버스」(Catholic Universe) 등의 주간신문은 그 좋은 예라 하겠다.
문서전도는 부족한 전교신부들의 수를 보충하기 위하여 둘도 없는 좋은 전교의 방변(方便)이 된다.
사실 가톨릭서적과 신문 잡지는 본당신부들의 대변자가 되어 효과적으로 전교사업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다. 본당신부들의 직접 다 감당하지 못한 교도사업을 가톨릭신문 잡지가 이를 보충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가톨릭언론이 종도전례의 숭고한 교도직(敎導職)의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는 점으로 보아 금번 가톨릭시보의 주간 발행은 한국교회 장래 발전에 있어 큰 사명과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부디 「가톨릭시보」는 시끄러운 정치성을 초월하여 한국 40여만 신자들의 좋은 「메쎈저」(Messenger)가 되며 또한 미신자들에게까지도 친한 벗이 되어 사랑을 받는 백 「퍼센트」교회정신에 맞는 순수한 가톨릭신문이 되어주기를 비러마지 않는바이다.
■ 외교인사들에게 교회의 안내자로서 - 박병래(의학박사 성루까병원장)
해방 후 모든 사업이 난관과 곤궁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2백여회의 발간을 본 귀지(貴紙)가 금반주간으로 발간함에 대하여서 진심으로 축하하는 바이다.
한국에 우리 종교의 발전사(發展史)를 볼 때에는 서적으로서 들어온 특이한 방법으로 순교선열(殉敎先烈)을 갖게된 우리교회의 업적을 볼 때 문서전교(文書傳敎)가 가장 유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교회내에 일반 미신자가 구독(購讀)할 수 있는 종류는 몇가지 되지 못하여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나 귀사 발간하는 시보(時報)가 주간으로 변경함에 대하여서는 일반이 구독할 수 있는 수가 늘고 따라서 종교의 도움이 크다고 생각된다.
정당한 이론 지도의 역할을 할 것이요 종교의 진리를 전할 것이오 교회내의 동태를 신속히 보도할 것이며 좋은 그릇됨이 없는 문예(文藝)를 기재하여 일반 독자로 하여금 이 어려운 사조(思潮)의 흐름을 막는 것이 가장 좋은 사명이 아닐가 생각한다.
가능하면 오자(誤字)가 없도록 충실할 것이요 선명한 사진(寫眞)을 게재하기에 노력할 것이고 신선한 취재(取材)를 함으로써 인기를 끄는 보도지(報道紙)가 될 것이다.
또는 한달이면 4회 내지 5회를 발간하게 되는데 적어도 2,3회쯤은 아돌을 위한 만화(漫畫)든지 어른을 위한 설문란(設問欄)을 두어 일반의 호기심을 도웁는 것도 널리 선전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또는 각 지방의 사무소를 두어 일반의 연락을 취하게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된다.
이상 여러가지 점은 이미 실행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나 노파심으로 해가 바뀌고 새해가 되는 이때에 가톨릭주간의 발간을 축하하는 뜻에서 몇마디 췌언(贅言)한다.
■ 「가톨릭 액숀」의 기관지가 되기를 - 이해남(외국어대학 교수)
너무나 어려운 십자가의 길을 걸어온 줄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 「가톨릭시보」가 이제 주간지로서 한거름 발전해나간다는 소식을 듣지니 감개 무량함을 금할바 없다. 날마다 십자가를 지기로 되어있는 우리들로서 아무리 무거운 새 짐이 지워진들 별로 더 무거워질리는 없으나 자원하여 그것을 더 감당해내겠다고 나선 그 용기에 고개 숙이는 바이며 험난한 「골고타의길」을 여기까지 걸어온 그 인내에 찬사를 애끼고 싶지 않는 바이다.
6.25 이후 10년동안에 그 신도수를 배가한 한국 가톨릭이 무엇보다도 필요를 느끼는 문서 전도에 있어서는 그다지 전진이 없었던 차에 이제 「시보」가 주간이 되고 지면 확장이 되어서 주일마다 50만 신도들의 마음에 새무장을 줄 수 있게된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분명히 커다란 전진이요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지상의 교회는 전투의 교회이며 그 전투는 원수들 미워하며 싸우는 보통 전투가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원수를 위하여 싸워주는 세속과 육신과 마쉬를 상대로 하는 불천주야의 싸움인 것이다. 이 싸움에는 한사람의 면제나 보류도 없이 전체가 다 동원되어 있는 것이며 그 지휘관은 성직자들이나 실제의 전투는 우리 졸병들이다. 맡아서 하는 것이며 이 전투에 필요한 무기는 오직 진리 그것뿐이다.
그러나 우리 장교들은 무장이 완전할런지 몰라도 우리 졸병들의 무장은 사실 너무나 빈약한 것이 많이 않을가? 더구나 아주 짧은 기간에 20만이 넘는 신병들을 긁어모아놓았으니 그들의 무장을 위하여 무엇이 가장 요구되며 무엇이 제일 급한 것인지… 그것이 바로 본지와 같은 활자로 찍혀 나오는 인쇄물이 주야로 눈에 띠게하는 그 문서 전도라는 점을 새삼스러이 지적할 필요가 또 있을가!
바라건댄 「매스 카뮤니케니숀」시대의 전도의 무기 「가톨릭시보」가 진정한 「가톨릭 액숀」의 기관지로서 눈부신 발전을 나날이 하여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