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여자처럼 밤새껏 길을 찾아 헤메었건만 그녀는 아직도 질펀하게 평쳐진 습지 한가운데 서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사방을 휘돌아본다.
나무 한그루 풀포기 하나 보이지 않는 거무튀튀한 불모의 습지가 지평선 끝까지 이어져있다.
그 막막한 습지의 벌판 한가운데 무의미한 들조각처럼 박혀있는 자신을 느낀다.
갑자기 기름땀으로 흥건히 젖은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살려 주세요오』
그녀는 발버둥치며 목청을 돌군다.
습지가 그녀의 목소리를 삼켜버린채 멀리까지 보내주지 않는다.
그래도 그녀는 자꾸 자꾸 소리를지른다.
살려줘요, 살려줘요, 살려줘요?
이윽고 혼신의 힘으로 고함치는 그녀 귀에 흐미한 음향이 들려온다.
방향감각마저 잃어버렸지만 그녀는 흐미한 소리 나는 쪽으로 마구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교풀 같은 습지의 탄력이 그녀의 몸을 놓아주러 하지않는다.
머리칼이 흩어져 눈앞을 마구 가린다.
흐미하던 음향이 점점 가까워진다.
음향이 희망처럼 그녀의 내부에서도 마구 울리기 시작한다.
숨이 찬다.
음향이 몹시 가까워진다.
음향을 잡으려는듯 그녀는 진창속에서 몸을 힘껏 위로 솟구쳤다.
솟구치는 서슬에 눈이 뜨였다.
<꿈이었구나!>
미사(韓美沙)는 안도와 실소(失笑)와 약간의 노여움을 동시에 느낀다.
잠시 끊겼던 전화벨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희망처럼 느꼈던 음향이 바로 이소리였구나 짐작되었다.
모든 것이 다시금 허망하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미사는 전화를 받기도 귀찮았다. 얼마동안 받지않으면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끊어버리겠지.
그녀는 계속 울리는 전화를 아랑곳 없이 욕탕으로 갔다.
<밤새껏 진탕에서 헤맸으니 우선 몸부터 씻자>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농담을 걸어보려 하였으나 그것도 별로 감흥이 일지 않았다.
전화가 끊긴다.
<그러면 그렇지!>
미사는 만족하면서 욕조에 몸을 담구었다. 그리고 오늘은 일을 쉬리라 생각한다.
간밤의 꿈 때문만도 아니게 요즘 미사는 어딘가 몸이 개운치 않다. 식욕도 별로 없고 밤에는 땀이 흐른다. 잠옷이 흔건하게 젖을때도 있다.
하긴 과로였을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녀는 거의 쉬는날이 없이 뛰어다녔다.
직책상 그녀에게는 여행이 잦다. 난생 처음보는 외국 여행객을 안내하며 그녀의 발길이 안닿은데는 별로 없다.
미국인을 위시해서 프랑스인 독일인 영국인 남미인 동남아인 하다못해 아프리카 사람도 이따금씩 끼어있다.
요즘에는 일본 관광객이 부쩍 늘어 관광붐을 이루다시피 하고 있지만 미사는 일본인 안내는 고의로 피한다.
회사 측도 영어 독어 불어 서반아어를 불편없이 구사하는 미사를 굳이 일본인 안내까지 맡게하지는 않는다.
세상사를 잊고싶은 미사에게는「관광 안내역」이라는 직책이 썩 마음에 편했다고 할수 있다. 더구나 상대하는 사람이 먼나라에서 온 여행객이라는 점도 좋았고…. 여행때 사귄 외국인 가운데는 저명인사도 있고 더러는 부담없는 마음의 교류를 느끼는 인사도 있었다.
그 중에는 남자도 여자도 젊은이도 늙은이도 있다. 대개의 경우는 비행기에 오름과 동시에 그들과의 조그만 우정도 끝나기 마련이지만 때로는 편지의 왕래라든가 그밖의 방법으로 여지껏 친교가 계속되는 수도 있다.
그러나 미사로서는 그들 외국인들과의 친교도 낯선 우표 수집 정도의 흥미밖에는 느낄수가 없다.
몇 년을 내리뛰는 동안 경제적인 여유는 생겼다.
때로는 외국인 실업가와 우리나라 실업가를 연결지어 주는 부로커 역할도 했으며 그때마다 적지않은 커미션도 받았다.
그렇듯이 돈을 벌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꾀를 부리지 않았다.
다만 명분이 있는 일에 한해서만 그랬다. 가령 여행자의 객수를 위로하기 위한「여자친구의 알선」따위의 막된 짓을 한 적은 한번도 없다.
지금 미사가 속해 있는 조광관광에서는 그녀를 꽤 많은 계약금으로 묶어놓고 있으며 간부급의 대우로 그녀를 소홀히 하지 않는 이유도 따지고 본다면 그녀가 알게 모르게 세운 공로 덕분이다.
남의 말 좋아하는 축은 조광관광의 태명호(太明浩) 사장이 재기 활발하고 미인 가이드인 한미사에게 한껏 선심을 드러내 보이는 증좌라고 뒤에서 공론을 펴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남에게 돋보이는 모범적 기업주를 지향하는 태 사장으로서는 개인적인 선심을 결코 공적인 특혜와 혼돈하지는 않는다.
회사 측으로 볼 때 한미사는 결코 소홀히 대할 수 없는 보배다운 존재라는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쉬어 야지!>
목욕을 끝내고 미사가 그렇게 제 자신에게 다짐하면서 침실 겸 거실로 쓰는 방으로 나왔을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또 다시 전화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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