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3월18일 서울ㆍ평양ㆍ대구ㆍ원산ㆍ연길 5교구장은 3월6일부터 경성에 모여 협의한 끝에 「가톨릭 진행에 대하여」라는 공동교서를 발표했다. 「가톨릭 진행」이란 지금의 「가톨릭 운동」으로 그때 표현을 빌리면 『신덕을 보존하고 영신상 물질상 모든방법으로 천주교회의 권리를 높이고 보호하고 주창하기 위한 여러활동』을 일컫는 것.
평양교구 목요한 주교가 「조선 가톨릭 진행회」위원장으로 피선되었고 「진행회」는 교회 출판활동을 강화, 이를 통한 「매스ㆍ콤」선교의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5교구 연합 출판위원회」 (위원장 서울 원 주교) 를 구성했다. 「5교구 출판위원회」는 서울교구 주관 아래 ①세속 신문 잡지상에 천주교를 반대하거나 문란케 하는 기사를 조사 면박하고 ②5교구에 통행하는 이전 잡지와 새 잡지를 발행하는데 힘쓰며 ③가톨릭의 좋은기사를 세속 신문 잡지에 소개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이 취지에 따라 그 해 6월에 창간된 것이 「가톨릭 청년」이다. 말하자면 「가톨릭 청년」은 교회 안팎의 지성인을 상대로 한 문화선교의 기치 아래 가톨릭이 창간한 첫 고급 교양지다. 「가톨릭 청년」 창간에 따라 서울교구 청년회가 발행하던 「별보」 (월간)와 대구교구 청년회가 발행하던 「천주교회보」 (월간)는 발전적 폐간을 했고 가톨릭 잡지계는 교우 상대의 대중지 「경향잡지」와 「가톨릭 청년」으로 양분되었다. 「가톨릭 청년」은 그때 교회로선 대단한 결심 끝에 내린 출판정책의 쇄신에 힘입어 탄생한 셈이다.
『가톨릭 정신은 사랑과 광명 평화의 정신이니 이 정신을 널리 뿌리기 위해 「가톨릭 청년」을 창간하노니 중도에 그치지 말고 조선 가톨릭의 좋은기관으로서 천주의 영광과 공중의 이익이 되라』
이러한 창간사가 실린 첫호가 나오자 당시로선 내용이나 겉꾸밈이 수준이 높다는 평과 함께 상당한 환영을 받았다. 주간은 윤형중 신부였고 장면 장발 정지용 이동구 등 젊고 패기에 찬 엘리트들이 편집위원이 되어 때로는 밤을 새우며 잡지 만들기에 전념했다.
이때 이들에게 무슨 보수가 있는것도 아니고 고료를 지불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들은 일반대중을 상대로 수준높은 잡지를 발간한다는 자부심에서 열심히 일했던 것이다.
가격은 1부 15전이고 1년 구독료는 1원이었다.
발간은 전기 「5교구 연합 출판위원회」책임 아래 하는 것으로 되었지만 실제는 서울교구가 전담했다.
기구상 각 교구에서 출판위원으로 임명, 이들이 한달에 한번씩 모여 편집과 운영을 논의하도록 짜여져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출판에 있어 첫 연합사업이라 할 「가톨릭 청년」 발간은 연합사업으로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당초 「가톨릭 청년」 발간은 「경향잡지」를 제외한 기타 정기간행물 발간을 정지시키고 5교구가 연합으로 보급에 힘쓴다는 합의아래 실현되었고 5교구장은 창간호부터 차례로「가톨릭 청년」출현에 최대의 찬사와 함께 지원을 약속하는 글을 실었다.
그러나 운영비를 공동부담하지 않는 명분만의 연합사업이고 보니 자연히 이 약속이 해이해지게 되었고 게다가 교구 출판위원들은 잡지 편집과 운영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까다롭게 간섭해와 이들 비위를 맞추는 일에 꽤 신경을 써야했던 모양이다.
당시 주간 윤형중 신부의 회고. 『겉으로 보기에 출판 진용은 잘 짜여진 셈이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선 도움을 받는 일도 많지만 귀찮은 일을 당하는 수가 더 많았다. 가령 내가 아무때 보낸 아무까의 시는 잘된 것인데 왜 싣지 않았느냐, 또 몇월호 몇페이지에 실린 글은 우리교구 아무 본당 누구의 것인데 어찌 내 손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발표하느냐는 등…
도시에 지사를 내는 것도 문제다. 그 교구 대표 신부를 거쳐 하자니 일이 부자연스럽고 거북하기만 했다. 지사장이 잡지대를 떼어 먹었으니 대표위원이 그것을 대납하거나 보증인이 되어 주느냐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고 독자를 얻어 보내느냐 하면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다』 결국 출반동기는 좋았으나 서울교구 혼자 출판비용을 대느라 허덕이다 3년반만인 36년 12월 호를 끝으로 『친애하는 독자들이여 여러분이 사랑하던 「가톨릭 청년」은 청년의 자기목적 달성에 노력했으나 희망을 채우지 못하고 이제 죽는다』는 비장한 폐간사와 함께 서울교구 스스로가 『칼을 들어 사별하고』말았다. 당시 서울교구장 원 주교가 「가톨릭 청년」을 사별하는데는1934년 평양교구가 발간한 「가톨릭 연구」와 36년 연길교구가 발간한 「가톨릭 소년」이 제대로 커 「경향잡지」와 함께 세가지 간행물로 충분하다고 인정하여 『조선 출판물의 통일을 위해 자원으로 「청년」을 희생한다』는 것이 표면상의 이유였지만 내면에는 발간에 따르는 경제적 부담이 컸고 「가톨릭 연구」와 「가톨릭 소년」 발간이 당초 주교회의의 약속과 다르다는데에 오는 불만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봐야겠다. 같은호에 실린 「폐간에 제하여」 기사는 『폐간은 경제문제에 원인이 있음이 아니다. 5교구의 공인과 후원이 있고 서울교구가 그렇게 빈약한 교구는 아니다.
일치단결속에 가톨릭의 힘이 있는 것인데 현금가톨릭 출판물은 통제성을 상실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우리는 비합법적으로 지녀오던 「가톨릭 연구」와 「가톨릭 소년」의 승격을 위해 스스로 희생한다』면서 주교들의 일관성 없는 출판정책을 꼬집고 나섰다.
이런 역사를 지닌 「가톨릭 청년」은 그 후 11년만인 1947년 4월호로 서울교구에서 속간되었다. 6ㆍ25동란으로 한동안 쉬다 55년 1월호부터 다시 발간되었고 71년 9월 「창조」로 개제 발간되다 1년만에 「자의반 타의반」의 어려움을 남긴채 폐간하고 말았다.
가톨릭의 젊음과 지성을 대변 지난 40여년간 사랑을 받아온 「가톨릭 청년」ㆍ지금은 명맥이 끊어졌지만 지난 역사에 비추어 다시 살아나리라고 많은 사람들은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고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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