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의 나는 신에 대한 것이라면 무조건 냉소부터 했다. 천지창조건 인간 구속의 교의건, 심지어 새벽에 들리는 성가 소리까지 찬양조로보단 풍자가조로 만들었었다. 삶에 대한 구체적의식마저 없이 미치광이 같은 찰나적 향락에만 들떠 있었으므로 교회 근체에 대한 인상은 거의 아무 것도 마음에 다가오지 않는 상태였다. 그럴수록 인생은 너무도 허무하게만 느껴졌고 모든 인간이 가엾은「광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인생이란 무대 위에서 뽐내며 망설이다 소식 하나 없이 공수거해 버리는 서툰 배우들. 그래선가 온갖 공사직에 종사하면서도 내 천성의 이백적 기질은 도무지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그것이 마음껏 생을 엔조이해 보고픈 욕망으로 발전하여, 부모가 남겨 준 막대한 재산을 불과 10여년 동안에 송두리째 탕진해 버렸던 것이다. 이윽고 주위 사람들의 간곡한 권유도 뿌리 친 채 정처없는 유랑길에 오르고 말았다. 지난 3월 중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 거리에 엎어져 버릴 때- 까지의 그 유랑생활이 내게 준 것은 다만 몹쓸 질병 하나뿐이엇다. 눈을 떴을 땐 포구가 아득히 바라보이는 야산 기슭의「마리아회 행려환자 구호소」쓸쓸한 병실 한구석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무신론적 생활 습관을 극복하지 못했던 나의 과거 그러면서도 자신이 저지른 죄의식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무서워하기만 했던 생활이 비로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이곳 수녀들의 숭고한 정신 때문이었다. 그들의 일거일동을 주시하는 동안 가톨릭시즘 속에서 새로운 휴매니즘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현존하는 인간성의 제문제 해결을 위한「키」의 가능-비로소 나는 신앙의 이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아졌고 성경 읽기와 가톨릭 연구에 열중하게 되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사실 나는 반가톨릭의 선봉에 서 있었던 것이다. 아내와의 감정적 대립과 이혼, 그리고 그 아내가 교우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런 그릇된 마음가짐 때문에 지금 와서 귀의한다는 게 쑥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랴. 그럴수록 나는 다만 속죄해야만 하는 것을! 다만 신앙 속에서 이제야말로 진심으로 빛나게 살고플 따름인 것을! 그러나 내 나이 이미 육십을 바라보니 얼마 남지 않은 여생 동안 그숱한 죄들을 모조리 기워 갚을 수 있으런지….
하기야『공맹 같은 성인도 제 잘못은 모른다』는 옛말도 있다. 범인인 나로선 무엇보다 우선 용기를 내야겠고 나의 연약성을 오히려 기꺼이 자랑해야겠다. 초라하고 연약할수록 그리스도로 향한 믿음이야말로 유일한 힘과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어떻든 나의 귀의는 이제 확고한 것이 됐다. 그것을 확고로 유도해 간 두 가지의 구체적 체험이 있다. 그 둘 다 검은 수건을 쓰고 세상의 모든 육체적 향락을 끊어버린 성직자 및 수녀들과 관계 있는 것이다. 그들의 박애심과 마음에서 우러나는 미소는 나 같은 철면피에게도 아름다운 충격이 되곤 했다. 바로 양심의 매질이 되기도 한다. 밤안개 가득 낀 어느 깊은 밤이었다. 한 불행한 결핵환자의 일종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집도 절도 따뜻이 맞이해 줄 사람도 하나 없는 가련한 인생들의 종착역인 이곳 구호소. 쓴 웃음으로 지난날을 되씹으며 무서운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고독한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들은 혈육에게도 못다할 정을 쏟아 주는 것이다. 그날 밤도 그랬다. 밤 새도록 한잠도 자지 않은 채 죽어가는 환자의 평안을 빌어 주고 찬송가를 불러 준다. 이곳 이름 그대로 마리아의 상징이라 할까. 그들을 보면서 나도 그날 밤 참으로 잠들 수 없는 충격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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