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한(韓)민족은 못된 이웃인 일본의 36년에 걸친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는다.
교회로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따지고 보면 한국교회는 이날까지 영일(寧日)을 누려본 적이 없다.
1784년 교회창설 이후 1886년 신교자유(信敎自由)를 얻기까지 1백년간 역사는 한마디로 순교사로서 그 길은 핏자욱으로 점철되었다.
1세기에 걸친 박해를 거쳐 1886년 한불 수호조약(韓佛修好條約)체결로 신교자유를 얻었다고는 하지만 그 기간은 불과 20년을 조금 넘을 뿐 한일 합방으로 이민족(異民族)의 손아귀에 우리의 국권을 빼앗기면서 수난은 또 계속되었던 것이다.
일제(日帝)지배의 36년을 인고(忍苦)해온 민족은 이제 국권을 되찾은 기쁨에 환희를 외쳤고 교회는 밝아오는 대지위를 활보하여 펼칠 복음전파에 가슴 부풀어 있었다.
그 해 9월 9일 오전 10시 명동대성당에선 전날 서울로 들어온 미군과 신자들이 성당을 메운 가운데 해방을 감사하는 미사가 봉헌되었고 교회는 착착 새살림을 준비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 가운데 국토가 양단되면서 한국교회 앞길에는 또 다른 수난의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었다.「죽음의 행진」「붉어진 땅의 십자탑」「분도회 수난기」등으로 표현되는 또 다른 수난 그것은 어쩌면 이조(李朝) 1백년간에 걸친 수난보다 더욱 모질고 참혹했는지도 모른다. 암운(暗雲)은 해방과 함께 해방군(解放軍)을 자처하며 38선 이북에 진주해 들어온 소련군이 몰고 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투박스러운 군화가 스치는 곳곳에서 목자와 양들의 신음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첫 신음은 만주땅 연길교구(延吉敎區)에서 울렸다.
일본 항복 이전에 이미 한만(韓滿) 국경지대에 진출한 소련군은 9월 2일 독일인 엔겔레만 첼네르 수사를 총살한 것을 신호로 삼은 듯 곧이어 팔도만성당을 덮쳐 신자 2천의 이 교회는 약 2개월간 파괴와 약탈을 당했고 그동안 신부 수사 수녀 80여 명은 쫓겨다니는 토끼모양 소련군 자동차소리만 듣고도 이리뛰고 저리뛰는 피난의 생활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46년 4월말 만주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갔다. 이 지역을 물려받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외국인 선교사들을 잡아 가두는 한편 잘 가꾸어 놓은 수도원을 비롯 각처의 교회 재산들을 몰수했다.
5월에는 교구장 브레헤르 백주교를 위시한 독일인 신부 19명 수사 17명 수녀 2명 이태리인 수녀 1명을 체포하여 연길 삼도구 무산 세 곳에 나누어 가두어두었다 49년 12월 본국으로 추방했다.
그러나 이같은 외국인에게 취했던 온정(?)도 잠시였다.
소련군이 북한에서 철수하기 직전인 1948년 12월부터 이북전역에 걸쳐 박해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덕원분도수도원에 마수가 뻗힌 것은 49년 5월9일 밤 10시.
정치 보위부원들을 가득 태운 트럭 한 대가 수도원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40여 년간 가꾸고 키워온 이 수도원의 모든 질서와 농장 현대식공장 신학교 목축장 등 훌륭한 시설들은 그들의 발아래 짖밟히고 말았다.
그들은 원산교구장 사우에르 신주교와 수도원장 부원장 덕원 대신학교 철학교수 신부 등 4인의 책임자를 깨워 그 시간에 협의할 일이 있다고 체포해간 후 이튿날 그곳 한국인 수사 신학생들은 내쫓긴 고아들처럼 뿔뿔이 흩어졌고 끌려간 독일인 성직자들은「죽음의 행진」을 거쳐 살아남은 이들은 1954년 소련을 경유,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같은 시기에 평양교구에도 불어닥친 박해의 바람은 대한민국과 정보를 교환하였다는 이유로 홍용호 주교를 비롯 주요 성직자들을 정치 보위부로 연행해갔다. 이에 앞서 덕원수도원이 폐쇄되고 성직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있자 평양교구 홍 주교는 남아있는 북한교구의 총책임자의 입장에서 김일성에게 다음 4개항의 항의서를 제출했었다.
①한국에서 40여년간 농업 교육 과학 문화 등에 허다히 공헌한 선교사들을 불법 체포한 사실과
②교회를 폐쇄한 것은 확실히 종교박해로서 북한 정권의 헌법 위반이다.
③교회와 개인과는 공연(公然) 구분되는 것으로 일개인의 범죄로 교회를 폐쇄함은 상직적으로라도 용납할 수 없다.
④체포된 전원을 즉시 무조건 석방하고 교회들을 개방하라.
이 항의서는 북한 내무상 박일만에게 전해져 박은 홍 주교와 면담할 것을 요청해왔다.
49년 5월 14일 오후 홍 주교는 평양 서포(西浦)에있는「영원한 도움의 성모회」수녀원을 방문 중 박의 면담 통보를 받고 4시 15분 수녀원을 떠났는데 그 후 주교관에 돌아오지 않은 채 어디론가 끌려가 생사를 알길 없다.
그 후 평양교구에는 진남포 안주 의주동 몇 곳만 신부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은 황해도 지방도 마찬가지였다.
49년 4월 이후 북한교회가 당하는 참혹한 박해가 남하한 신자들에 의해 전해지자 6월부터 남한에서는 이북교회돕기 운동을 벌이는 한편 북한교회를 위한 특별기도회를 본당마다 돌아가며 매일 열어 한 울타리안의 양떼로서 아픔을 같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기도의 여운이 채가시기도 전에 6ㆍ25의 비극이 온 강토를 뒤덮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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