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성교사기」訂正小考(정정소고) - 경향잡지 59년 6월 所載(소재)
발행일1960-01-03 [제210호, 3면]
(1) 217면 상단
『이 나라는 유도(儒道) 이외에 다른 것을 숭배하지 않았나이다. 주자(朱子)와 맹자(孟子)와 노자(老子)의 서적 이외에 다른책들은… 인정치 않고 더구나 가르치는 일은 절대로 없나이다』라 번역하였는데 이는 필시 「달레」(I. Iv, 211)
따라서 이상과 같은 번역은 너무나도 극심한 실수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노자도(老子道)란 유가(儒家)에서는 「이단(異端)」으로 인정하고 취급함은 우리 재상서(宰相書)만 보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니 거기 초두에 「伏以…韓愈之攻斥佛老者는 恐其感亂黔首也」라 하였고 저뒤에 가서 또다시 「老莊은 失之於虛無하고 仙佛은 失之於幻妄」이라 하지 아니했는가.
그러면 「달레」의 불란서 말역인
(2) 213 하단
『동시에 알렉산델의 두동지 옥(玉)천희와 김 베드루 김유산(金有山) (214항 하단에도 有山이라하면서)이 잡혀 투옥되었다』라고 번역하였으나 이 김 베드루는 분명 김한빈(金漢彬)으로서 「달레」에도 또 나라문서에도 다 옳게 김한빈으로 적혔거늘 (「달레」I. lv, 199-200 또는 208항 참조) 경향잡자의 번역은 무엇에 근거를 두고 한 번역인지 그 출처를 알 수 없다.
여기 말하는 옥천희(玉千禧)의 영세본명이 무엇이었던지를 아지 못하여 저 황(黃)사영 백서(帛書)에 두번이나 나오는 『오직 홀로 죄인이 요행이 면(免)하고 요왕이 들어나지 않음은 (苦聖不露) … 죄인이 죽지 않고 요왕이 무고하오니 (苦聖武故)』라 한 이 「약망」을 「달레」는 그 소주에 (202항 小註) 『혹시 최(崔) 요안이 아닌가』하였으나 여기 말하는 최요왕(즉 「관천」의 별호를 가진 崔昌顯)은 백서 쓸 무렵이면 잡혀 치명한지 이미 오랬으므로 이에 대하여 『약망물노 또는 약망무고』라 할 수 없는 즉 이 「약망」이 누구일까 하여 오래동안 궁금해오던 중 산구정지(山口正之)씨의 옥천희 영세본명이 「약망」이었다함에서 나의 이 큰 수수께끼가 풀려 매우 반가운 일이다.
나는 아직 그 사료적 근거는 발견못했으나 그때 모든 환경과 경위(帛書에 말하는 품으로 보아 이 「약망」은 북경주교가 남달리 잘아는 사람처럼 보이는 점)를 따져보아 수차 북경에 왕래가 잦아 주교께 잘 알리어졌던 옥천희 요왕이 틀림없으리라 믿는다.
(3) 213면 하단
현(玄) 베드루 계흠(啓欽)에 대하여 『그는 1799년 동래항에 며칠동안 정박하고 있는 서양배를 보고서『라한이 1799년 (「달레」에도 같은해로 되어있지만)은 나라문서와 외국기록에 분명히 두해를 앞선 1797년인 것이다. 이 빼는 부루-톤(W. Robert Broughton)의 어느린 쁘로비단스(Providence)호(號)를 말함인데 이 소위 「북태평양탐험항해(北太平洋探險航海)는 연이어 4년간 (1795-1798) 실시된 것으로서 그 세번째 항로(航路)가 곧 1799년에 이루어진 것인데 이해 9일에 일본 진경해협으로부터 노령(露領) 화래도, 연해주의 연안을 거쳐 원산(元山)만(灣)에 남하(南下)하여 이 만을 제 이름에 따라 부루-톤만(Broughton Bay)이라 이름짓고 동년 10월 초두에 저 대마도를 다녀 다시 동래(東萊) 부산에 나타나 약 1개월간 우리 조선 남해안을 실측하면서 동년 동월 29일엔 제주도를 멀리 바라보면서 남하한 일이 있는데 이 때 베드루 현계흠이 급히 동래에 내려가 십자성호를 크게 그어 뵈이며 천주교신자임을 표시했으나 별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이 영국배에 대한 정동유(鄭東愈)란 자의 「주영편(晝永編)」이란 견문기에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