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설전문] 니메겐 典禮會議(전례회의) (2)
공동체에 참가하는 길
전례를 生活化(생활화) 하도록
발행일1960-01-03 [제210호, 3면]
4. 전례운동
전례운동의 목적은 신자들을 교회의전례생활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도록 끌어당기는데 있읍니다. 그때문에 그의 본질적인 사목(司牧)의 뜻이 최근 몇해동안에 더욱 뚜렷하게 되었읍니다. 전례의 제일의의(第一意義)와 그 목적이 의심없이 천주의 흠숭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흠숭이 그리스도 신자 공동체의 참가를 요구하고 교회의 흠숭에 적극적으로 참가함으로써 신자들이 참다운 그리스도교 정신의 훈련을 받습니다. 성 「비오 10세」의 유명한 말씀대로 「가장 신성한 신비와 교회의 공식 신공에의 적극적 참가는 참다운 그리스도교 정신의 첫째가는 없을 수 없는 샘(泉)입니다.
거기서(제사의 이루어지는 일 자체로부터의 ex of erce of erato 효과와 비적-성사-이외에) 특히 미사에서 신자들은 어떻게 기도하고 흠숭하는가와 어떻게 천주를 만유위에 모시고 어떻게 그 어른께 자기를 바치는가를 배움으로써 그들이 하나의 현실적 공동체로 익여지고 그들의 신앙이 밝아지며 힘이 생깁니다. 이 관념을 교종 「요안 23세」께서 그의 최근 회칙 「Sacerdotii Nostri Primordia」(성 비안네 백주년 기념으로)에서 아름답게 설명하셨읍니다. 가장 세련된 또 가장 웅변적 귀절 가운데의 한 대문에 그가 이르시기를 「미사의 제사는 언제나 사제만을 위한 개인적 성화(聖化)의 원칙과 샘(泉)이 아니라 그의 사도적 활동이 되어야한다. 실로 사제로서의 사도직이 세례로 갱생(更生)하여 죄를 씻은 백성들이 신앙으로 일치되어 제대를 둘러싼 모임에 있지 않다면 그 본질적 활동을 무엇으로 생각할 것인가?
거기서 사제가 자기만이 받은 권능의 효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의 찬미와 세상의 구속을 위하여 갈바리아산 위에서 이룩하신 희생을 갱신(更新)하는 거룩한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거기 모인 그리스도 신자들은 사제를 통하여 그 거룩하신 「희생자」를 하늘에 계신 성부께 바치는 동시에 자기를 자신들을 「생활하고 거룩하고 천주께 의합한 희생으로」(로마서 12,1) 자기자신들을 제물로 삼기를 배운다. 거기서 신앙의 설교로써 계몽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보하고 생명을 발견하여 자라고 만일 필요있으면 일치를 재건(再建)한다. 거기서 한마디로 말하면 세대를 거듭하면 온세계의 모든 가(邊)에서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애덕위에 건설되어가고 있다」라고 하셨읍니다.
만일 전혜의 사목상 중요성이 그러하다면 그 적절성(適切性)과 가치와 여러 전교국가에 있어서 그리스도신자 공동체와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세우는데 그의 중요성이 뚜렷합니다. 우리 전교 노력의 최고점은 일치정신과 천주께의 자기봉헌 정신으로 제대의 우리에 모이는 백성을 닮는 것입니다. 오직 제대의 두리에서만 그 백성들이 진정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상을 가출 수 있읍니다.
5. 생활한 전례
전례를 그 뜻대로 -정신적 및 진실한 공동 흠숭 그리스도교 정신의 학교-만들기 위하여 전례움동이 「생활한 전례」를 요구합니다. 이것은 신자들이 이해하는 전례, 자기들의 신앙감정을 발표할 수 있는 매개체(媒介體)를 제공하는 전례, 자기들에게 실지적인 신앙체험이 될 수 있는 전례를 뜻합니다. 어떠한 방법으로 생활한 전례를 얻겠읍니까? 물론 첫째가는 방법은 싡자들의 진실한 교도(敎導) 전례와 그의 여러가지 요소들의 -상징, 동작, 독경- 명백한 설명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또 특히 전교국에서- 더욱 필요하게 생각되는 바는 즉 전례 자체의 개혁과 적응(適應)입니다.
「트렌트」공의회 까지는 전례에 관한 건의 대부분이 주로 각 주교의 권한에 메어있었읍니다. 그 때문에 허다한 남용이 있었읍니다. 그때문에 미사경본과 일과경본의 개혁과 통일이 있었읍니다.
그 결과로 「트렌트」이후에는 아무런 발전이 거의 없게 되었읍니다. 그리고 동일한 전례가 -로마인의 천재에서 나온 존경의 가치가 있는 표현법- 모든 전교국에 이식(移植)되었읍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이 전례의 실천상 「대(大) 그레고리오」성인께서 권고한 실천법이 영국에 파견된 선교사들과 「아우구스띠누스」와 「멜리투스」가 서로 대립되었읍니다. 그 어른이 그들에게 전례구성상 상당한 자유를 허락하셨읍니다. 「비오 10세」성인께서는 전례의 철저한 개혁의 시기가 왔음을 개달으셨읍니다. 「비오 12세」께서는 전례에다가 사목적 효과를 재건하고 중세기 이래 민중과 전례 사이에 자라난 장벽을 무너뜨리려는 견지에서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셨읍니다. …
6. 전례용어
한가지의 개혁은 전례용어에 관한 것이었읍니다. 그의 본질적인 원칙을 「비오 12세」께서 「Mediator Dei」에 체계화하였읍니다. 양어(兩語) 예절이 대담하게 채용된 것을 볼 수 있읍니다.
미사 자체로 말하면 첫눈에 보이는 것 보다 훨신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성좌(聖座)의 움직임이 신중합니다. 나는 여기서 라틴어 사용의 찬부(贊否)에 관한 논쟁을 토론할 필요가 없읍니다. 「교회의 상당한 성분으로 관용(慣用)되는 라틴어 사용은 교의(敎義)상 진리의 어떠한 부패에도 효엄있는 해독제(解毒劑)가 되는 것과 마찬가디로 일치의 뚜렷하고 아름다운 표적(標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예절에 관련된 모국어의 사용은 민중에게 많은 편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허가를 내리는 권한이 오직 종도좌(宗徒座)에게만 부여되어 있다」(메디오토르대이)
최근 「시리」추기경께서 전례상 라틴어와 모국어(이타리어)의 불타는 문제에 관한 교서(敎書)를 반포하였읍니다. 그 교서가 「Ephemerides Liturgieae」에 라틴어로 요약되었읍니다. 전하께서는 라틴어가 과거에도 또 우리 시대에도 전례의 이해를 위하여 처익일수 없이 난삽(難揷)한 것이 아님을 주장하십니다. 전례에 대한 무지는 언어상 무지의 결과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가톨릭 교의를 잘 배워가지고 그리스도교적 분위기를 호흡하면 전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따라옵니다. 그 어른의 결론은 신성한 현의(玄義)를 이해하기가 어려움은 단순히 언어문제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타당한 문답공부가 없는 것과 불완전한 사목활동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른이 라틴어가 전례를 충분히 또 완전히 이해하는데 장애가 됨을 부인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타린어를 제거하기를 저주하는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그 어른의 주장은 전례를 판단하는 제일 표준이 신자들의 일치가 아니고 천주께 맞기운 예배라는 것입니다. 전례의 주요한 부분이 사제를 위하여 보류되어 있읍니다.
이 때문에 전례 절차의 보다 큰 부분을 위하여 라틴어가 대치될 수 없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