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 丁(정) 茶山(다산) 先生(선생)
淑夫人豊山洪氏 文度公茶山若鏞先生 之墓(숙부인풍산홍씨 문도공다산약용선생 지묘)
발행일1960-01-03 [제210호, 3면]
다산선생은 죽은 후 123년만에 비로소 그 무덤이 훌륭하게 수축되고 묘비까지 세워지게 되었으나 이 일을 이룩하게 된 데는 문교부를 비롯하여 각 교육기관과 경기도지사와 핸더슨씨의 힘이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핸더슨씨의 추념사 속에는 그처럼 박해를 받던 다산선생의 사상과 학문이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어진 오늘에 와서는 위대한 것으로 여겨져 국제적으로 존경을 받게되었다는 것을 밝혔다. 무덤 앞에 세워진 묘비의 앞쪽에는 叔夫人豊山洪氏度公茶山若鏞先生之墓라는 글자가 새겨있고 그 뒤쪽에는 文度公行狀이 새겨져 있었을 뿐으로 그가 천주교 신자이었다는 글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째든 지난날의 위대한 인물들을 기념하는 일이 차차 일어나게 된 것은 민족문화를 발전시키고 국제적 이해를 두텁게 하는 의메에 있어서 반가운 일이라 하겠다.
다산선생은 1762년 6월 16일에 「소내」(小川)라고도 불리워지는 한강가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마재」라는 마을에서 정재원(丁載遠)의 네째아들로 태어났다. 그 모친은 전라도 해남(海南)에 살던 유명한 시조의 대가인 「고산(孤山)」윤선도(尹善道)의 손녀이었다. 「다산」은 약현(若鉉) 약전(若銓) 약종(若種)이라는 세 형님과 약황(若鎤)이라는 동생과 누님 하나와 누이동생 하나를 갖게되었으나 맏형과 동생은 일찌기 죽고 누님은 정조(正祖) 때의 영의정(領議政)이던 채제공(蔡濟恭)의 아들인 채홍원(蔡弘遠)의 아내로 되고 누이동생은 이승훈(李承熏)의 아우이던 이치훈(李致熏)의 아내로 되었다. 다산은 10세 전후에 모친을 잃고 부친에게 글을 배웠으나 한편 유명한 남인(南人) 학자로서 광주(廣州)에 살다가 1763년에 죽은 「성호 이익」(星湖 李익)의 지은 책을 보게됨에 이르러 실학(實學)과 서학(西學·天主敎)의 연구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리하여 남인 출신의 다산은 권철신(權哲身) 권일신(權日身) 이벽(李蘗) 및 그 형들과 더불어 1777년부터 천주교의 교리를 연구하던 끝에 1783년에는 그의 친적되는 「이승훈」으로 하여금 북경(北京)에 들어가 세례를 받고 다음해에 돌아오게 하였다. 「베드루」라는 이름으로써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은 곧 「다산」에게 「요한 세자」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을 비롯하여 다른 친구들에게도 세례를 주는 한편 1785년 봄에는 서울 명례동(明禮洞)에 살던 중국어 통역관 「김범우」(金範禹)의 집에 모여서 조선천주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이 교회는 곧 관리들에게 발견되어 해산되고 김범우는 잡히어 귀양가 죽게되었으나 때마침 글을 좋아하던 정조가 자리에 있고 채제공이 정승을 지내고 있었으므로 다른 교우들에게는 별일이 없게 되었다.
이러한 때를 틈타서 교우들은 다시 비밀히 교회를 다시 세우고 북경에 사람을 보내어 신부를 보내줄 것을 간청하게 되니 1794년말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模)가 들어오게 되었다. 한편 다산은 1789년에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임금의 사랑을 받고 홍문관(弘文館)의 벼슬을 지내면서 많은 책을 보게되었다. 바로 이 때에 정조가 수원(水原)성을 쌓게되니 다산은 1792년에 기중기(起重機) 법을 써서 나라의 많은 비용을 절약하게 하고 1794년에는 경기도 연천(連川) 지방의 암행어사(暗行御使)로 되어 관리의 기풍을 살피었다. 이러한 때에 중국인 신부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니 남인의 시파(時派)를 미워하던 노론(老論)의 벽파(僻派)들은 교우들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산의 재조를 애끼던 정조는 1795년에는 그를 충청도 홍주(洪州) 금정(金井)의 찰방(察訪)으로 보내고 1797년에는 그를 황해도 곡산(谷山) 부사(府使)로 삼아서 그에게 큰 해가 미침을 면케하였다. 이때 다산은 그때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병이던 마마병(媽疹)을 고치기 위하여 마과회통(麻科會通)이라는 책을 짓는 한편 착취에 허덕이던 백성의 딱한 사정을 살피게 되었다. 그후 다산은 1799년에 서울로 불려오게 되었으나 때마침 그해 1월 18일에는 남인파의 영의정이던 채제공이 죽고 다음해 6월 28일에는 정조마저 19세로써 갑자기 죽게되니 다산은 곧 벼슬을 내놓고 마재로 물러가 스스로 여유당(與猶堂)이라는 호를 쓰면서 형제 문인들과 글을 닦고 있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그 아들인 순조(純祖)가 11세로써 자리에 오르니 정조의 계조모로서 일찌기 정조의 부친인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이게 한 벽파의 김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정권을 잡고 시파를 숙청하기 위하여 바로 그해(1800)부터 교우를 잡아들이기 시작하여 다음해에는 이른바 신유(辛酉)년의 큰 박해를 일으키에 되었다. 이 박해로 말미암아 닷한의 형인 약종 아오스딩을 비롯하여 3백여명의 교우가 피를 를리게 되었으나 때에 40세이던 다산은 한때 경상도 장기(長기 迎日)로 귀양가게 되었다가 이어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가족과 생이별하고 귀양하게된 다산은 처음의 7년 동안은 강진읍 동문밖에 있던 주막집에서 몸을 숨기게 되었으나 차차 동네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주게 됨으로써 이름을 언게 도었다.
이때 다산의 외가댁 친척으로서 강진읍 남쪽 15리쯤되는 귤공(稿洞)이라는 곳에 살고 있던 윤박(尹博)은 그를 그의 산정(山亭)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다산은 스스로 다산이라는 호를 쓰면서 외가댁에 있던 1천여권의 책을 이용하여 학문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제자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다산은 그의 살던 정자집을 다산초당(艸堂)이라 부르고 그앞에 동시의 두 암자(庵子)를 세워 글방으로 삼았다. 다산은 눈앞에 강진만(灣)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면서 전후 11년간 이곳에 머물르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있어서 부패한 정치를 바로잡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경제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등의 유명한 책을 짓게 되었다.
그러던 중 다산은 1818년에 이르러 세도를 잡고있던 사파의 김조순(金祖淳)에 의하여 귀양살이가 풀러저서 마재로 돌아오게 되니 이후 18년가을 두고 이른바 다산학(茶山學)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있어서 지은 책으로서 특히 유명한 것은 잔악한 형벌법을 고치기 위한 흠흠신서(欽欽新書)이었다. 한편 다산은 의술(醫術)로서도 이름을 얻게되어 1830년에는 효명세자(孝明世子)의 급한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부승지(副承旨)의 벼슬을 도루 받게되고 1834년에는 순조의 위독함을 구제하기 위하여 왕궁으로 불려들여졌으나 이들은 모두 다산의 치료를 받기전에 죽게되었다. 바로 이때에 다산의 조카이던 정하상(丁夏祥) 바오로들의 결사적인 전교활동으로 조선교회는 다시 살아나고 1833년 겨울에는 중국인 신부 유방제(劉方濟)가 들어오게 되니 다산은 유신부로부터 종부성사를 받고 1836년 2월 22일에 75세로써 선종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산의 두 아들 즉 학연(추山 學淵) 학유(學遊)도 부친의 뜻을 받아 벼슬살기를 싫어하고 교우로서 평생을 보내게 되었다.
다산이 불우한 반평생을 학문연구에 오로지 바쳐 그 사이에 있어서 지은 책이 무려 5백권에 이르고 있으니 그는 우리나라 역사상에 있어서 가장 많은 책을 지은 학자이었다. 그의 학설은 모두 백성의 생활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으니 이러한 사상은 천주교 사상에서 얻게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동서양의 학술사상을 종합하여 그때의 부패한 정치를 우리생활에 알맞도록 개혁하기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다산의 위대한 학문을 연구하고자 하는 일이 우리민족의 해방과 더불어 국내외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홍이섭(洪以燮) 교수를 비롯한 젊은 학자들 사이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고 국외에서는 일본 미국에서도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미국외교관이던 「그레고리 핸더슨」(Gregory Henderson 韓大善)씨는 아시아 연지라는 학술잡지에 「한국지성사(知性史)의 한 연구로서의 정다산」(Chong Ta-san A Studt in Korea Inteilctual History)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뒤이어 1958년 봄에는 한국주재 미국대사관의 문정관(文政官)으로 나오게 되었다.
한국에 외교관으로 두번째로 나오게된 「핸더슨」씨는 우선 그가 연구하던 다산선생의 무덤을 찾아가보고 너무도 초라하게 버려져있음을 알게되었다 이에 그는 1958년 8월 30일 저녁에 그의 집으로 다산선생의 5대손은 정향진(丁向鎭)씨와 양주군 출신의 전민의원 여운홍(呂運弘)씨와 필자를 불러놓고 그 스스로가 다산선생의 무덤을 수축함과 아울러 비석을 세우겠다는 의견을 묻게되었다. 이에 우리들은 그의 뜻의 갸륵함을 어엿비 여겨 좋은 뜻이라고 말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뜻있는 다른 학자들과 다시 만나서 상의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그해 9월 13일 저녁에는 우리 세 사람 외에 이병도(李丙燾) 박사, 조윤제(趙潤濟) 박사, 홍이섭(洪以燮) 교수, 한우근(韓佑劤) 교수, 천관우(千寬宇)씨가 그의 집에 모여 「정다산선생기념사업회」를 만들기로 이야기가 되게 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