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애가 다녀간 후 미사는 줄곧 어떤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그것은 은애를 자기가 맡았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은애가 다녀간 후 미사는 갑자기 더 주위의 삭막함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은애 같은 총명한 아이를 곁에 두고 그녀의 뒷바라지를 맡아해 준다면 자신의 인생에도 어느 정도의 생기와 긴장감이 생기게 되지나 않을까.
한참 자랄 열일곱살 소녀를 간악한 사태진 같은 폐인 그늘에 방치해둔다는 것도 어쩌지 불안스러웠다. 사태진이라는 작자는 인간의 심정을 갖지 못했으니 필요에 쫓기게 된다면 은애라도 아랑곳없이 팔아넘기고도 남을 위인이라는 생각에 미쳤을 때는, 그때, 은애를 그냥 보내지 말고 잡아둘 것을! 하는 자책마저 느끼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은애가 사태진의 손에 의해 팔아넘겨질 것만 같은 초조감마저 생겼다.
황망히 다녀가는 은애에게 주소를 알아두지 못한 불찰도 뉘우친다.
미사는 주사도 맞을 겸하여 병원을 갔다가 원장실로 유 박사를 찾았다.
『조리 잘하고 있습니까?』
『네, 박사님 지시를 조금도 어긴 적이 없어요. 술도 끊었고…』
『착하오. 식사와 수면은?』
『식사는 그런대로 잘합니다만 운동 부족인가 봐요. 약간 불면증 증세가 아직 남아있어요. 그래서 유 박사님께 의논드리고 싶은데 저도 뭘 좀 하고 싶어요. 물론 힘든 일은 아니고요. 어떤 소녀의 뒷바라지라도 맡고 싶어요.』
『소녀? 왜 하필…』
『박사님 혹시 사태진이라고 아시는 지요?』
『그 이름이라면 내 앞에서 꺼내지도 마오. 지금 내 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나는 주저없이 협박공갈 파렴치범으로 잡아넣고 말겠소』
유 박사의 기색은 갑자기 삼엄해졌다.
『어느새 그 염치없는 놈의 손이 미사씨한테까지 뻗쳤나? 다음에 뭐라고 인연을 걸어오면 두말할 것 없이 나한테 연락해요, 대한민국 교도소가 아무리 만원이라도 그런 놈 들어갈 자리는 남아있을 테니. 나는 예관수와는 달라.
그런 놈 때문에 평생을 탕진하다니 예관수도 결코 똑똑한 사람은 못되지.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나는 오히려 사태진이보다 예관수 그 사람에게 더 분노가 터진단 말이요』
유 박사는 마치 미사가 예관수라기도 하듯이 삿대질을 하면서 흥분했다.
『어떻게 된 일인데요. 대관절?』
미사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 박사는 그제서야 미사 앞에서 너무 흥분한 꼴을 보인 것이 계면쩍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창가로 다가가서 잠시 창밖을 말없이 내다보았다.
『눈이 오겠군!』그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미사가 궁금한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6ㆍ25가 터지기 직전에 예관수씨는 주동숙양과 약혼했었지. 물론 사랑하던 끝의 약혼이었는데 그 당시 예형은 대학졸업반, 주양은 대학신입생이었다오. 내가 형식적인 중매장이 노릇을 맡고 조촐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약혼이 성립된게 아니었겠소. 이북에서 단신 월남한 예형에게는 일가부치라고는 한 사람도 없어서 내가 그의 형 노릇을 대신했지요. 물론 정신적 면으로만 그랬지.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소. 그런데 예형은 그 당시 졸업논문 준비 관계로 자료 수집차 지방으로 내려간 사이에 6ㆍ25가 터지고 두 약혼자는 부득이 갈라지게 되었지. 그랬는데 문제는 서울에 남아있던 주양이 자의건 타의건 그건 여기서 따지지 맙시다. 부역을 했어요. 나는 주양의 신경을 이해합니다. 그녀는 동경하던 대학생이 되자마자 전쟁이 터졌지만 대학생 노릇을 계속하고 싶었다는 그 요구가 그만 화근이 된게죠. 그녀는 미술대학생이었는데 계속 학교에 나가서는 김 아무개와 스탈린의 초상화를 기계적으로 그려댔지요. 물론 그것은 충성심 때문은 아니었지.
그러자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는데 9ㆍ28 금방이 되니 그들은 월복을 강요했을 게 아닙니까. 물론 주양은 잠적했어요. 그는 약혼자를 만나야 한다는 큰일이 남아있었고 초상화장이 노릇은 이젠 그만이란 심리상태였거든. 하지만 약혼자를 만나기 전에 부역자로 붙들리게 되었소. 전쟁이 갓 끝난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그 무렵의 치안상태가 중구난방이며 거의 무법지대가 아니겠소? 물론 재판과정도 없이 주양은 사형선고가 확정되고 말았어요. 그때 주양을 구해낸 것이 사태진이었지. 어느 미군 첩보부 대장이던 사태진은 주양과 아는 사이도 아니었으나 한눈에 반했다고나 할까. 하여간 어찌어찌 노력 끝에 주양을 구출해 낸 것까지는 좋은데 자유를 얻은 주양은 그날부터 사태진에 의해 또 다른 감옥에 갇히게 되었소.
그의 여자가 되고 만거요. 이런 소리를 들으면 어떤 사람들은 주양의 절개가 기껏 그 정도였느냐고 반발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역시 그건 일종의 불가항력이었을 게요.』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해요. 주 여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거예요.』
『그날 밤의 행패는 일종의 강간이었을 거요. 강간을 당한 주양은 엎친데 덮친다고 그만 임신이 되고 말았소.
그때의 아이는 유산이 되고 말았다지만 그런 몸이고 보니 학도병으로 원산까지 진격했다 후퇴한 예중위가 아무리 약혼자를 찾아도 그녀를 찾을 수가 있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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