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線(전선)에서] 咸昌(함창)
護敎(호교)의 역군되기 위한 교리지식 연마를 역설
신자의 살림사리까지 마음쓰면서
발행일1960-01-03 [제210호, 4면]
「천주께 바친 경당 우리신도를 천주만대로 빛나리라. 더욱 杢龍雨君의 특지 아름답도다 천주강생 1954년 11월 24일」
비지(碑誌)가 보여주는대로 신도들의 정성이 어려서 헌당된 천주의 궁전.
왕이신 그리스도상이 팔을 벌리고 1만명의 주민이 허덕이고 있는 함창의 거리를 굽어보면서 「수고로운 자와 무거운 짐진 자는 내게로 오라」금방이라도 포옹해줄 자세로 기두리고 있다.
어느 본당에도 매한가지지만 보좌신부마저 없는 본당의 주일은 사제생활에 있어서 정말 고된 날이다. 본당, 공소, 이곳 저곳에서 찾아온 신자들의 영신지도, 때로는 생활의 걱정을 같이 마음써야할 일선의 자세는 명실에 있어 성실한 아버지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 본당의 주임 「레기날드 엑네르」신부는 우리네 이름을 뽄따서 왕묵도(王默道)라고도 부른다.
그는 1930년대에 만주 간도(間島)에서 전교사업에 진력했었고 8.15후 중공군에 피납되어 성베네딕또회원 형제들과 함께 중노동의 고초를 겪었다.
「어서 오십시요! 오래간만입니다」내미는 그의 소박한 손길과 봄날 같이 화창한 미소에는 다섯시간이나 삭풍을 뚫고 흔들리어온 나그네의 피로를 없애는드시 사라지게 한다.
그윽한 인생의 향기!
교중의 안부를 무르매 띠엄띠엄 흠사히 흐터져있는 자녀들의 살림사리를 말하듯 퍽도 다정다감하다. 올해 같은 재해에도 그의 관할지역에서만은 별로 피해가 없었다는데 아무리 곡창의 고장 상주 함창이라지만 교우들의 생활상은 안타깝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2천3백명 농민의 아버지, 아니 영신의 아버지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리스도왕을 주보로 뫼신 이 성당은 1954년 11월 24일 고 요왕 최 주교님에 의하여 축성되었고 공소시절까지를 합하면 70여년의 역사를 간직하여 5,6대의 태중요우집안이 있는데 그 옛날 선인들이 박해를 피하여 문경새재 산길을 걸어 이곳으로 흘러 왔음을 상기케 한다.
본당에 1천4백명과 4개면 10개공소에 9백명의 신도를 돌보기에는 평탄치도 못한 촌 길을 자전차를 타고 행상꾼처럼 쏘다녀야 한다는 이야기.
정열의 인간! 이 늙은 사제에게는 소망이 한두가지 아니다. 첫째 교우들의 신심이 보다 더 독실하여야 하겠고 희생심과 협동정신이 높아져야 하게싿는 것인데 그날 그날의 생활고에 지쳐서 신앙면에 소극적임을 차탄함이 아닐까? 둘째로 글을 읽어야한다는 것인데 그의 30여년의 포교생활을 통한 경험으로써 교우는 무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리를 요리문답으로서 배우고 성경을 읽게되면 국문은 누구나 다 해득하는 것인데 도무지 독서와는 답을 쌓고 있음에는 실망조차 느낀다는 것이다.
오늘날 같이 치열한 사상전에 있어서 한갖 영세하기에 요구되는 기초적인 교리지식만으로서 호교(護敎) 전선에 나서기에는 너무도 부족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꼬마들이 들락날락 하기에 물었드니 유치원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 유치원의 어린이들은 「어린이가 어린이대로」보전되어 잇음이 사실이고 어른들의 노리개가 아님을 보았다. 따라서 부화(浮華)한 차림이나 그러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의 말대로 한다면 「어린이의 교리서당」이다 표현 그대로 그것에 주력하고 있다. 어린이의 마음 속에 신앙의 삵을 움돋게 하고 동심(童心)을 천주께로 쏠리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할 과업이랴! 그러기에 그것을 위한 노력과 희생과 부담이 여간 큰 것이 아닌듯 하다.
본당구내에는 성당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새건물들이다.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인 사제관이 그렇고 강당이 또한 그러하다. 3년전에 이 본당에 부임한 이래로 그는 그이 이름(王默道) 그대로 묵묵히 길을 닦았다. 사무실 한구석에 놓여져 있는 상자에서 소인(消印) 찍힌 수두룩한 외국우표가 시선을 이끌고 있다. 많은 사업을 이룩하기에 그는 수많은 글월을 보냈고 또 받았음을 역력히 볼 수 있다.
만뢰구적(萬籟俱寂)에 홀로 깨어있어 불타는 목자의 정열과 함께 타이프의 키이가 불을 뿜었을 것을 생각하면서 그의 노고와 이름조차 몰으는 수많은 은인들에게 풍성한 은총으로 갚아지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