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의 속셈을 알고 있는 것처럼 전화벨은 끈덕지게 울리고 있다.
미사는 어디서 무엇 때문에 걸려오는 전화인지 빤히 알고 있는지라 호기심마저도 일지 않았다.
보나마나 비번(非番)인그녀를 특근명령이라는 명목으로 끌어내려는 전화일 것이다.
여태까지 미사는 비번이라하여 쉬어본적이 없다.
이유야 간단하다.
시설만은 나무랄데 없는 아파트 방에서 찾아갈 사람도 없고 찾아올 사람도 없이 온종일 전축이나 틀어놓고, 애꿎은 양주잔이나 흘짝흘짝 기울일 바에야 차라리 모든 것을 잊고 뛰어다니는 쪽이 시원하다.
게다가 특근에는 특근수당까지 붙게되니 일조이석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오늘만은 미사도 좀 쉬어야 할것 같았다.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우리는 휴식을 원한다」고 시위를 벌이는 것만 같다.
미사는 끈덕진 벨소리를 아랑곳 없이 배달된 우유를 마셨고 조간을 펴서 대충 훑어 보았다.
그 사이에도 전화는 줄곧 일정한 간격을 두고 멎었다간 다시 이어지곤 한다.
받지않기로 한 전화소리가 온 방안의 고요를 칼자국처럼 마구 짓 찢어 놓는데 미사는 견딜 수가 없다.
결국 미사는 수화기를 들어버렸다.
아무튼 이렇게 끈질긴 전화는 처음이다. 수화기를 쳐드는 손이 파르르 떨릴만큼 미사의 신경은 날을 세우며 곤두서 있었다.
미사는 상대방의 음성을 확인하기도 전에 불메인 목소리로 쏴붙였다.
『오늘, 나는 비번이에요. 아시겠어요? 오늘만은 어떤 특근명령이라도 순종할수 없으니 그리 아시고 전화 끊으세요』
그러자 전화 저쪽에서는
『앗차차 잠깐만 참으시오』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은 특근을 종용하는 총무부 직원의 목소리가 아닌지라 미사는 쭈뼛 뒷걸음질 쳐지는 느낌이었다.
『역시 싸움의 비결은 지구전이구먼. 비서실에서 전화를 안받는다고 단념하는 눈치기에 내가 끈덕진 공세를 폈소이다』
미사는 적지 아니 놀랐다. 전화로 그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틀림없는 태명호씨, 조광관광 사장의 목리였던 것이다.
『사장님께서 웬일이십니까. 진작 사장님이셨다는 걸 알았으라면 좀 공손하게 받을것 그랬나 봅니다』
『핫하 그런 점이라면 개의치 마시오. 어차피 사장이라고 특별히 훌륭하게 알아주지도 않을것 아니겠소』
『죄송합니다. 사실은 몸이 어쩐지 불편해서 특근만은 사양할 생각이에요』
『그 좋은 생각이오. 나 역시 건강문제 때문에 전화를 걸었소만, 그렇더라도 전화만은 선뜻 받아 주어야지…』
『저는 어쩐지 거절 결핍증라고나 할런지 아는 사람의 부탁에 거절을 못하는 야릇한 증세가 있어서요…』
『핫핫하. 그런 증세가 있었다니 금시초문이군. 한미사씨 답지 않은 증세가 아니오, 그건. 난 좀 더 드라이하고 싫다 좋다의 구별이 명확한 분인줄만 알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은것도 아니지만…』
『몸이 불편하다는 소리가 헛말은 아닌 모양이군. 한미사씨가 오늘은 어쩐지 횡설수설하는것 같은데…』
『그 정도의 증세는 아니지만 오늘만은 좀 쉬어야 할까 봅니다』
『하루 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오. 그 문제 때문에 급히 상의할게 있으니 곧 여기로 좀 나와주시오.』
『네?』
『물론 특근을 시키자는건 아니오. 오히려 미스 한의 건강에 관한 문제를 의논하자는 거지.』
『전화로 할수 없는 말을 해야겠으니 여하한 지금 곧 와주어야겠소. 난 열두시에 세종호텔에서 열리는 관광관계의 회의에 참석해야 하니 그 전에 꼭 만나기를 바라오』
태 사장은 자기의 용건만 말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미사는 얼떨떨해지는 기분으로 잠시 그 자리에 서있었다.
미사의 건강에 대해 의논을 하자는 태 사장의 진의가 아리숭했다.
전화를 걸기 전까지 태 사장은 미사의 컨디션이 좋은지 나쁜지 알고있었을 까닭이 없다.
미사는 줄곧 건강했으며 요즘 겪고있는 식욕부진이라든가 나른한 피로감 따위에 대해서도 미사 자신만이 막연하게 느끼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태 사장은 무엇 때문에 전화를 걸었을까.
미사에게는 슬그머니 의혹이 일었다.
사장은 혹시 나의 사직(辭職)이라도 바라는 것이 아닐까.
사직이란 어휘가 머리속에 떠오른 것은 별로 유쾌한 일이 못되었다.
그렇다고 큰 충격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사직하라면 하지 뭐. 사직을 원하고 있는건 아니지만 뒤가 깨끗해야 한다는게 내 주의니 말이야.
미사는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는데 그녀가 사직을 연상할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요즘 조광관광에서는 일본인 관광객이 부쩍 늘어남에 따라 어학에 뛰어난 재질이 있고 솜씨있는 가이드의 실적을 올리는 미사에게 일어교습을 한사코 종용하지만그녀는 끈덕지게 제3국언어를 통한 가이드만을 조건으로 내세운다.
그것이 종종 회사측과 묘한 알력을 일으키고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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