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무더운 날씨다. 모처럼의 청(請)은 시원한 글이었고 그것이 제격이겠지만 워낙 생기기를 시원한 것과는 연이 먼 사람이고 보니 신통한 글이 나올턱이 없다. 생겨먹기로 말하면 20년전의 일이다. 그때도 무덥던 여름방학을 하필이면 남들이 가자는 시원한 여행을 마다하고 20여일 걸친 하기 교리대학을 듣노라고 찌는듯한 강당에서 지났었다. 덕분에 성ㆍ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의 증명의 길도 터득하고 꽤값진 시간들을 보냈었다. 또 설혹 뾰족한 시원한 얘기꺼리가 있다손 치더라도 이 무더위에 읽은동안 그 시원함은 간데없이 땀만 솟을것이 분명하겠다. 비컨데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듯이 갑자기 내리 쏟아지는 한국의 소나기, 월남에서 겪은 아프기까지 한 스콜의 시원함 일본의 일광(日光) 중(中)_사(寺) 산정호반 미국 요세미테 국립공원이 천야만야 꺾어내리듯 흐르는 폭포수 등등 시원한 정경(情景)이 없을수는 없다. 하지만 상상만 하여도 이 더위에 그 사연의 설명들이 당사자가 아닌바에야 좀체로 시원함을 실감있게 전달하여 주지는 못할것이 뻔하다. 그럴바에는 나의 생겨먹은 멋대로 시원하게 무더위를 꺼나가보련다. 역설적인 이열치열식의 시원함을 느끼게 할지 모르겠다. 내 나이 내일이면 40 불혹에 접어든다는데 요즘 나의 경지는 죽음과 신앙의 씨름판 위에 있는 느낌이다. 아래의 이야기는 최근에 있었던 일이었다. 미국에 살고있는 처형이 5년만에 잠시 다니러 온 것이다. 불행히도 그 5년 사이에 아버지께서 작고한 것이다. 귀국한지 며칠 안되던 일요일 오후 서울 근교이 교회묘지에 성묘를 가게 되었다. 만리타향에서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한 딸은 지극하였던 아버지의 자애로운 사랑을 생각하고 눈물져 있는데 나는 몇차례 갔던 곳이었고 교회묘지의 성격에 맞게 잘가꾸어진 공원에 온 기분으로 산책을 나섰다. 묘는 크고 작을뿐 별로 다른것이 없었다. 이 무덤 저 무덤을 보다가 흥미를 끌게된 것이다. 무덤은 같아보였지만 비석만은 모양도 구구각각이었고 그 내용도 서로 다른 것들이다. 어떤 것은 성경말씀 어느 것은 화려하였던 경력 어느 분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의 한 대목을 또 어느 사람의 것은 친구들이 정성을 담아 새긴 말들이 있었다. 교회묘지이고 교회사람만 죽었나 싶을만큼 숱한 사람의 무덤과 비석들이 있었다. 이분은 이런 분이셨다고 강박적으로 알리려는듯 비석들은 한결같이 묘에 바싹 다가서 있었다. 그분이 어떻게 살다 가셨나를 알리기에는 비석이란 워낙 좁은것이 사실이다. 그 많은 비석들에서 귀중한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참으로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그처럼 값진 교훈을 생각지도 않게 우연히 터득하였다. 참으로 우습게 알게 된 진리이었다. 이름이 다르고 모양이 아무리 달라도 꼭 한가지만은 한결 같은 것이 있었다. 언제 나서 언제 가셨노라는.
그렇다. 서양사람의 묘비에도 마찬가지 진리가 새겨져 있었다.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 반드시 죽어가듯, 아무리 위인이었어도 남기고간 것은 시간뿐이었다. 살다간 것은 시간만을 남겼을 따름이로구나. 그것도 유한한 시간을. 그것도 아직까지 본질조차 규명되지 않은 시간 따위를 남기고가다니.
엄숙해지다 못해 숙연하여 지고 갑자기 더위를 잊게한다.
레오나르도ㆍ다ㆍ빈치는 죽음을 모두가 헛된것이라고 하였다. 제자는 「스승의 위대한 작품들이 있지 않습니까」반문하였다. 다ㆍ빈치는 역시 고개를 저었다. 기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전화에 불살러지고 말았다. 그 제자는 안타까와 「우리들 가슴속에 있는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있지 않습니까」 다시 반문하였다. 그의 대답은 「그것뿐이다」라는 한마디였다.
결국은 우리는 시간을 살다가고 시간만을 남기고 가는구나.
그 시간을 어떻게 사느냐함만이 남는다.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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