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유명한「현대 세계의 사목현장」은 세계에 열린 교회 즉 (ECCLESIA AD EXTRA) 세계를 위한 교회를 다루면서 머리말 제3조에서 인류에게 봉사하는 교회를 취급하고 있다.『인간이 받은 부르심의 숭고함을 선언하고…』『교회는 결코 현세적 야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제3조의 이 두 가지 표현은 전에 매우 널리 퍼진 어떤 의견과 비판에 상당한 제재를 가한다. 어떤 이들은 오랫동안 교회가 인간 발전에 역행했다고 믿어 왔다. 사실 교회는 피조물의 저하에 대해서 너무 강조하지 아니했던가. 그것이 마치 창조주의 영광에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또 교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종교를 설교하지 아니했던가. 교회가 세상을「슬픔의 골짜기」라 한 것은 달리 재건하기 위해 넉넉한 체질을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피하게 했다는 표현이 아닐까. 이것은 오해였다. 공의회는 사물을 제 바른 위치에 두면서 그 오해를 없애기 위해 모든 것을 다했다.「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의 내용과 어조와 문제는 교회의 사명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두지 않게 한다. 인간이 받은 부르심의 숭고함을 긍정하는 것은 교회가 시대의 취미에 맞추기 위해 입 끝으로 부르짖는 양보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계시의 중심에 있고 또 무기력한 신자만이 그들의 원수들 앞에서 순간적으로 감출 수 있는 영원한 진리를 혼연히 또 힘있게 긍정하는 것이다. 교회는 인간을 믿는다. 그러나 이 인간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무엇인가.
교회는「계속하는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 자신의 태도 외에 다른 아무런 태도도 가질 수 없다. 만일 교회가 이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 교회의 지체인 우리의 죄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는 돌봐 주고 고쳐 주고 구해 주고 위로해 주고 되살려 준다. 그는 착한 목자이다. 그는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긴다. 영예를 피하고 남을 위해 당신 생명을 준다. 그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온 것이다. 따라서 교회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혹자는 로마의 권력, 권위의 행사, 재력, 시대화의 타협 등은 무엇이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권력과 권위의 행사는 봉사하는 데 있고 교황은 자신을 기꺼이「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RVORUM DEI)」이라 부른다. 또 현대의 교회는 현대 문명의 여러 가지 생활 수단을 경시하지 아니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것임과 동시에 인간의 것인 이상 인간적 수단을 필요로 한다.
교회는 결코 현세적 야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교회의 권력이나 재산은 교회가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이다. 누구든지 남의 내적 요구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다.
누구든지 남의 일은 부분밖에 모른다. 그렇지만 교회의 인간적 수단의 상용은 언제나 겸손을 동반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엄격해야 하고 인간과 제도가 평범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성인들의 자기 포기 등의 표양을 본받고 예언자들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과 권위를 행사하는 이들 특히 성직자들에게 명령하는 대신 봉사자로 자처하는 많은 겸손이 필요했다.
선에 대한 노력을 하기 위해 자력과 물질과 기술과 인간을 필요로 하는 조직된 단체인 교회에 엄정한 최소한(MINIMUM)으로 만족하도록 자신을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복음적인 덕이다.
사실 그것은 복음 속에 언제나 발견되었고 또 교회 안에 내적 정화와 AGGIORNAMENTO에 필요한 이덕이 없지 않았다. 세기를 통해 교회는 주어진 사회 환경에서 사랑을 부르는 인간에 대한 봉사의 표가 되었던 병원 고아원 양로원 애긍 시사 등으로 인간들에게 봉사했다. 환경은 바꾸어졌으나 봉사는 그대로 남아 있다. 오늘 신자들은 세속적인 제도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특히 성직자들에게 이 봉사정신이 부족했다. 그래서 자각을 깊이하는 교회 즉(ECCLESIA AD INTRE) 교회 자신을 반성하는 교회는「교회에 관한 교의헌장」의 교회의 신비를 다루는 제 일장 8조에서 가난한 교회가 되기 위해 봉사하는 교회를 역설한다.
『그리스도께서는「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마음에 상처 받은 사람을 낫게 하시며」「잃어버렸던 사람을 찾아 구해 주시기 위하여」성부께로부터 파견되시었다.
이와 같이 교회도 인간의 연약성으로 고민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 주고 또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속에서 교회 창립자의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의 결핍을 덜어 주기로 노력하며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께 봉사하기로 마음을 쓴다』고 했다. 이것이 가난한자의 교회이다. 요컨대 현실에 있어「가난」에는 고행의 면이 보이지만 여기서 말하는「가난」은 사랑에서 전개된다. 그리스도를 닮은「가난」은 사물의 계량적인 조작에 있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사람에게 대한 사랑 즉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적 수단을 인간을 위해 바치는 데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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