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차근차근 이야기해봐. 나는 실상 예 선생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아버님은 공연한 오해를 하신 것 같지만 내가 예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불과 며칠밖에 안되거든』
『정말이에요. 선생님?』
소녀의 눈 속에는 역력히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공연한데를 와서 공연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는 듯한 후회의 빛마저 감돈다.
『그렇다면 은애, 사람은 오래 사귀었다고 많은 영향을 받는게 아닌가 보지. 단 하루만이라도 인생에서 다시 없이 소중한 희망이나 용기나 의지를 얻을 수도 있는 것 같애. 예 선생님한테서 나는 그런 것을 배웠어요. 이건 정말 은애 앞에서 떳떳히 말할 수가 있어』
『예 아저씨는 정말 그런 분이에요. 저도 전에는 아주 못된 까바라진 계집애였어요. 전 언제나 아버지 편에서 엄마를 괴롭혀 왔어요. 엄마가 죽어도 못가겠다고 울 때는 제가 아버지 편지를 신문사에 계신 예 아저씨께 날라가기도 했어요. 물론 협박편지였죠. 돈을 내라는 협박편지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부끄러운지…. 아버지는 온갖 악랄한 수단으로 아저씨를 협박해왔어요. 벌서 10년도 넘었을 거예요. 그때마다 아저씨는 요구하는 돈을 내어주시곤 했죠.
전 처음에는 아저씨께 협박을 받을만한 약점이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저는 그것이 터무니없는 일이란 걸 깨달았죠. 아저씨는 저희 엄마를 누이동생처럼 사랑해 오시는 거라는 확신을 얻었어요. 돈을 못 받아오면 아버지에게 학대받는 엄마가 가엾어서 그리고 돈 없이는 우리 가족이 살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언제나 돈을 내어주시곤 했어요. 엄마는 왜 우리 힘으로 벌어먹지 못하느냐고 시장으로 쫓아나가기도 하고 미제물건을 팔러 다니기도 했어요. 그때마다 아버지는 사사건건 방해를 놓았어요. 엄마를 미끼로 삼으려는 거였죠』
『당신은 내 장사 밑천이야. 분이나 바르고 업드려 있어』
그렇게 천한 욕지꺼리를 퍼부으며 엄마를 때리곤 했죠. 정말 이럴 수가 있을까요? 그보다 더 추악한 행패가 많았죠. 어느 때는 앓고 있는 엄마가 쓴 것처럼 편지를 보내어 문병오신 예 아저씨를 보고 기절할 듯이 놀라며 어서 가시라고 고함치는 엄마를 아저씨가 부축하자 어느새 사진을 찍은 아버지가 그것을 들이대며 또 협박을 하곤 했어요.
『예 선생님은 왜 그토록 협박을 참으셨지? 고발이라도 하시지』
미사는 분통이 터져서 마치 은애가 사태진이기라도 하듯이 윽박질렀다
『저도 그것이 안타까왔어요. 그러나 아저씨는 그러시는 대신에 몹시 슬픈 표정을 짓곤 하셨어요.
요구액을 말해요. 이런 방법이 아니라도 내가 마다한 적이 있습니까? 하시는 것이었어요』
『은애 말을 들으니 은애 아버지의 비행을 예 선생님이 조장하신 것 같기도 하군요』
『아저씨는 엄마가 아버지를 끔찍히 사랑하시는 줄로 알고 계시고 아버지가 저렇게 폐인이 된 이유가 당신 때문이라고 하시거든요?』
『폐인이라니?』
『선생님 모르셨나요? 저희 아버지는 고칠 수 없는 마약중독자예요』
『뭐라구?』
미사는 다방에서 사태진이 찻잔에다 줄기차게 퍼넣던 설탕 생각을 퍼뜩 머리에 떠올렸다. 마약 중독자는 단것을 많이 먹어야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리고 그이 무섭도록 누런 얼굴
『아버지는 여름에도 짧은 소매옷을 못 입었어요. 온 팔이 벌집 쑤셔놓은 듯이 주사바늘 자리가 나 있어요. 선생님 저희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에요. 한 조각의 양심 한 가닥의 인정 한 방울의 눈물도 없는 그런 사람이에요. 전 엄마가 잘 도망가셨다고 생각해요. 저도 도망가고만 싶어요. 하지만 전 그럴 수가 없어요. 아저씨와 약속한걸요. 끝까지 아버지를 보살펴 드리겠다고 약속했어요. 저희 부녀는 아저씨가 다달이 보내주시는 돈으로 먹고 살지요. 학교도 가고 직장도 아저씨가 구해주셨어요. 그러면서도 저희 아버지를 보살피는 사람이 없어질까봐 저하고 굳은 약속을 한거에요. 아버지는 그리 오래 살지는 못할 거에요. 그렇지만 눈을 감는 순간이나마「은애야 내가 나빴다!」하는 소리를 듣고 싶다는 아저씨는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리고 우리 둘이서 아버지가 그렇게 되시도록 힘을 모아보자는 거에요. 선생님 아저씨를 진심으로 위로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저씨를 좋아하는 분이 있다는 소리를 아버지가 했을 때 저는 얼마나 하느님께 감사했는지 몰라요. 이제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려나 보다 하고 말이에요. 아버지의 속셈은 선생님의 마음을 아저씨한테서 떼어놓자는 거에요. 아저씨 측근에 아무도 없어야 아버지한테 실속이 있을 거니 말이에요. 아버지는 아저씨가 엄마를 숨겨놓고 위장전술을 쓴다고 또 한바탕 공갈ㆍ협박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요. 아저씨와 저는 어떤 공갈협박에도 꺼덕하지는 않도록 약속했어요. 정말로 아저씨가 엄마를 찾아내신다면 아버지 눈에 안 띄는데 숨겨놓으시고 저에게 알려주시겠대요. 하지만 아저씨와 엄마는 순결한 사이에요. 그리고 아저씨께서는 꼭 선생님같은 분이 필요하시죠. 아저씨가 선생님같은 분의 위로와 격려를 받으시고 정말 사랑을 받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게 저의 소망이에요』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