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치하 36년간 숱한 수모와 탄압을 겪은 교회는 따라서 얘깃거리는 많이 간직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 한 가지 일본인 주교의 대구교구장 취임은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1941년말부터 종교계에도 황국신민화정책을 고집하기 시작한 일제는「일본제국 안의 천주교 교구장에 꼭 서양사람이 앉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외국인 주교 갈아치우기」에 발 벗고 나섰다. 처음 손댄 곳이 서울교구. 그러나 서울교구는 당시 교구장이던 빠리외방 전교회소속 아드리아노ㆍ라리보 주교(원형근)의 재빠른 조처로 이듬해 1월 3일 노기남 신부가 서울교구장에 피임되어 일본인 주교가 교구장으로 올지도 모를 위험을 미리 방지했지만 다른 교구의 사정은 여의치 못했다. 당시 대구교구장 뭇세(문제만) 주교 역시 여러모로 집요하게 사임을 요구해오는 사정 아래서 서울교구와 같은 방법으로 한국인에게 교구를 물려주기로 작정하고 접촉을 벌이기 시작했다 문 주교는 42년 7월 7일 일단 동경주재 교황사절을 통해 교구장 사임을 표한 후 후임교구장 인선과 추천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동경주재 교황사절을 비롯 서울원산 주교 등과 빈번한 접속을 가졌다. 그러나 이에 앞서 있었던 서울교구의 전격적인 교구장 교체에서 쓴맛을 본 총독부가 대구의 움직임을 방관할리가 없었다. 문 주교가 가는 곳마다 형사가 따랐고 서울교구 방식을 택할 것을 눈치챈 총독부는 본국 정부를 통해 동경주재 교황 대사관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서울교구장 교체를 적극 도왔던 교황대사는 대구교구장에 한국인이 임명되면 대구는 물론 전 한국교회가 그나마도 평탄치 못할 것을 염려하게 되었다. 그 해 7월 22일 문 주교 앞으로 온 교황청 지시는 한국인 신부로 후임을 결정하라는 것이었으나 그 후 8월 21일「마렐라」주일 교황대사는『한국인 주교는 현재 사정으로 미루어 어렵고 일본인 주교가 유력하다』고 알려온 것으로 미루어 정치적 외교적 압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결국 그해 8월 29일 교황청은 문 주교의 사표를 수리하고 그 후임으로 일본 셀다이(仙臺)교구 부감목 하야사까(早坂久兵衡ㆍ이레네오) 신부를「수페따누스(Sufetanus)주교」명의로 대구교구장에 임명한다고 발표했고 이 사실은 9월 10일 공문으로 문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문 주교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한국교회는 처음 일본인 주교를 맞게 되었다.
한국인으로선 결코 본방인(本邦人)일수 없는 일본인 주교를 방인(邦人)주교로 맞아야 하는 비통스러운 분위기 가운데 10월 25일 오후 3시 대구주교좌 성당인 계산동성당에서 3대 하야사까 교구장의 착좌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국적이 어디든 교구장은 교구장이다. 교구 신부들은 그 앞에 나가 순명을 약속했고 이어 강당에서 열린 환영회에서 하야사까 교구장은『오늘날 본방인(本邦人) 교구의 성립을 볼 수 있도록 그동안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아 대구교구의 내용을 이처럼 충실히 하여준 빠리외방전교회의 공적을 못내 감사하는 동시 그 공적을 새 자본 삼아 오늘부터 군국과 대구교구를 위해 심신을 희생으로 바칠 것을 각오하는 동시에 일반의 협력을 빈다』고 담담한 표정으로 답사를 했다.
하야사까 주교 성성식은 착좌 두 달 후인 12월 25일 오전 9시 계산동성당에서 문 주교 주례 노기남 야마구찌(山口愛次郞ㆍ나가사끼교구장) 두 주교 조례로 조촐하게 거행되었다.
이날은 간소한 축하식 하나도 없이 기념촬영만으로 끝난 쓸쓸한 성성식이었다.
1887년 셀다시(仙臺)에서 출생, 당년 55세였던 하야사까 주교는 일본인 첫 주교로서 전 나가사끼 교구장이던「하야사까」주교의 친제(親弟)로 로마「울바노」대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 철학박사 학위를 가진 말수 적고 인자한 학자 타입의 성직자였다.
대구교구장 피임 전 가지 25년간 셀타시본당 주임신부로 조용히 살아온 그에게 있어 울분에 가득한 이국식민지의 교구장직이란 어렵고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교구 신부들로부터 따뜻한 정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실정아래서 그는 조용히 교구장직을 수행하면서 틈틈히 총독부를 드나들며 교회의 어려운 일들을 처리하는데 도움을 주곤 했다.
지병인 척추 가리에스 때문에 건강이 좋지 않던 그는 서울서 열리곤 하던 주교회의에도 참석치 못하는 때가 많았다. 같은 주교로 재임중 접촉이 많았던 노기남 대주교는 그 역시 자신의 어렵고 미묘한 입장을 잘 알고 있어 가능한 한국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감정을 일으킬 일은 삼갔던 「지혜롭게 헌신했던」주교로 기억하면서『대구교구장으로 지낸 3년이 그의 생애에 가장 큰 십자가였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예로 1945년 6월 대구교구의 교세는 신자 수 2만7천2백98명인데 이는 1942년 하야사까 주교 부임시보다 1백39명이 감소된 숫자로 그간의 전교가 얼마나 어려웠던 일임을 말해준다.
1945년 초부터 지병이 악화 병석에 눕게 된 하야사까 주교는 그 해 성목요일의 성유축성 미사를 신부들의 부축을 받으며 지내고 다시 병석에 누어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하야사까 주교는 곧 교황청에 사표를 냈으나 해방 후 혼란한 때라 교황청도 즉각 수리하지 못했고 그러는 가운데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일어나지 못하고 이듬해 1월 6일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하야사까 주교의 유해는 대구 남산동 대구대교구청 구내 성직자 묘지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계속)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