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복음화가 가능한 가난한 자의 입장은 하느님 앞에 선 최초의 단독자의 입장이다. 그에겐 어떤 선입견도 개념도 없고 전혀 가난하다. 만약 아담이 개념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면 그는 순수하게 하느님을 경험한 것은 아니다. 그는 말씀을 상상(말씀자에 대한 선입견)에 의해 이해했을 것이다. 「말씀」인 하느님은 어떤 선입견도 그에게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전혀 가난한 입장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절대주관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경험의 복합을 순수 주관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며 순수 주관이 없이는 어떤 하느님도 관각적 체험의 종합에 불과하다.
우리가 형이상학의 신을 처음 이해할 때 순수논리에 의해 신개념에 도달하는 건 아니다. 논리 이전에 마음의 눈이 형상화 된 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주인이나 아버지 등의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유추된 개념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느님은 개념화 될 수 있을까?
하느님은 당초 말씀이었지만 말씀(言語)의 말씀은 아니었다.
신비신학적인 표현을 빌리자면은 말씀 자체였던 것이다. 바벨탑의 역사가 이를 암시해 준다. 어느 날 말씀이 말씀 속에서 빠져나갔을 때 말씀(언어)은 말씀이 아니라 혼돈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언어(말씀)로서 하느님을 이해하지 못하며 정확하게는 가난한 마음으로만 하느님과 만난다는 기본태도를 정립하는데 이의를 갖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에서 신비를 빼버리면 무엇이 남겠는가? 신비 속에선 모든 것이 기적이며 자연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비 밖에서 신비를 말할 수 없다. 최종적인 해결은 신비 속에나 있을 뿐이다.
빠스칼이『우리는 아담의 영광스러운 상태도 그의 죄의 성질도 그 죄가 우리에게 유언했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상태 속에서 일어난 것으로서 우리의 현재의 이해력의 상태를 넘는 것이다』라고 한 것도 원조범명에 얽힌 사연이 신비의 세계에 속함을 말한 것이다. 만약 그것이 신비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면 저 키에르케골에게서 통박된 것과 같이 원죄의 교의는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것이며 복음화의 개념도 마찬가지로 무의미해질 것이다.
우리에게 이교도의 세계라는 것은 처음부터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고향을 떠난 실향민일 뿐이다. 만약 전 인류가 하나의 고향에서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언어로서가 아니라 심정으로서일 것이다. 이 확신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며 지상은 끝없고 무익한 변증법의 경쟁장에 불과할 것이다.
진실로 복음화의 의미가 만개한 것은 교회가 정치적 최소수로 남아있었던 초기 박해시대였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빠스칼의 말과 같이 복음화는 결국 자기희생으로써 그 의미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종교는 현명하면서도 어리석다. 현명하다는 것은 그것이 가장 지혜롭고 기적이나 예언 위에 든든하게 서있기 때문이다. 어리석다는 것은 인간을 거기에 귀의시키는 것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적이나 예언 등은 이 종교에 귀의하지 않는 자를 정죄할 것이지만 거기에 귀의하는 자에게 신앙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믿게 하는 것은 십자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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