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봉사정신은 구약의 애주애인의 계명에서 출발한다. 예수는 구약성서에서 말하는「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자기의 것으로 한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함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일치하며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일치하며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맞갖은 윤리적 태도를 요구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애주애인의 사랑의 계명을 받아들일 때 예수는 비로소 자기를 따를 수 있다고 하였다. 예수는 구약의 이 근본적 요구를 통해서 당시 유태인들의 형식적 법정신에 의해서 흐려지고 그릇된 봉사정신을 바로잡고 정화하였다. 그리고 당시 희랍인들에게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봉사정신에 완전히 새로운 뜻을 부과하였다. 이는 곧 사람은 봉사함으로써 비로소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선언이 아닐 수 없다.
【가】신약성서의 용어 중「봉사하다」(DIAKONEO) 라는 동사는 어떤 사람이 식사할 때「시중을 든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일밭에서 돌아온 주인이 하인에게 말하기를『너는 내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를 동이고 시중 들고 너는 나중에 먹도록 하라』(루까 17ㆍ8) 하였다. 이 단구에서「식탁에서 시중을 들다」는 동사는「봉사하다」라는 뜻이고 종의 역할이 곧 식탁에서 주인의 시중을 드는 것이 가장 자연적 태도임이 분명하다. 또다른 예는 예수께서「베다니」에 갔을 때 마르따가 식탁에 앉은 예수께「시중을 든다」는 사실을 「봉사하다」라는 동사로 표현한다. (요한 12ㆍ2) 이상 두 예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식사의 장면에서 호화롭게 차려놓은 식탁에 앉은 주인이나 귀한 손님의 위치와 허리에 띠를 돌리고 시중을 드는 종이나 하녀의 위치가 서로 대조적이라는 사실이다. 복음에서 예수는 항상 깨어 기다리는 종을 상 주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든다.
주인이 갑자기 집에 돌아왔을 때 깨어 있는 종을 만나면 주인은 기꺼이 자기의 옷을 벗고 종의 옷을 입고서 허리에 띠를 동이고 종을 주인의 자리에 앉히고 식탁의 시중을 든다고 하였다 (루까 12ㆍ37) 예수가 이런 비유로 말씀한 이유는 봉사정신의 위대함을 혁명적으로 선포하기 위해서였다. 예수의 혁명은 다른 것이 아니라「봉사하는 것」과「봉사함을 받는다」는 이 두 상반된 윤리적 가치의 서열을 완전히 전복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예수의 제자들이 누가 제일 높으냐 하는 것으로 논쟁이 벌어졌을 때 말씀하시기를『세상에서는 임금들이 백성을 지배한다. 그리고 집권자들을 공로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다. 너희 중에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낮은 사람처럼 해야 하고 또 지도자는 봉사하는 사람처럼 해야 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또 계속해서 말하기를『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아 식사하는 사람이냐?
식사하는 사람에게 시중을 드는 사람이냐? 식탁에 앉아 식사하는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너희 가운데「봉사하는 자」로 와 있다』고 하였다. (루까 22ㆍ23~27) 상식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식탁에 앉은 주인이 시중을 드는 종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예수는 봉사함을 받는 것보다 봉사하는 것이 더 낫다는 단순한 상식을 훨씬 초월하여 봉사한다는 사실을 하나의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실제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강조해서 말하기를『나는 너희들 사이에 봉사하는 자』라고 선언하였다. 이는 또 달리 말해서 제자들의 영도자요 스승인 인자는 그가 천국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제자들에게도 세상 말에 그와 같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을 요구하였다는 부정할 수 없는 실재라는 뜻이다. 봉사하기 때문에 이러한 위대한 권능을 받는다는 말이다.
『너희는 내가 시련을 겪는 동안 함께 당해 왔으니 이제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권능을 너희에게 준다. 너희는 내 나라 내 식탁에서 먹고 마시며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심판관으로 보좌에 앉을 것이다』(루까 22ㆍ28~30) 예수는 따라서 인간의 일반적 처세나 행위에서 그의 윤리적 도덕적 가치관의 근본적 전복을 요구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서 봉사할 수 있고 봉사해야 한다는 새로운 존재 양식을 어떤 뚜렷한 실재로 제시하고 있다. 식탁에서 시중을 든다는 아주 평범한 사건에서 출발하여 또 손수 식상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음으로서(요한 13ㆍ12~17) 예수는 봉사정신의 위대함을 표현하였다.
【나】신약성서는「봉사하다」는 동사를 식탁에서 시중을 든다는 뜻 외에 넓은 의미로「봉사하기에 늘 준비되어 있다」는 뜻으로도 사용한다.
예를 들면 루까 8ㆍ3에서 예수를 따르는 여인들이 그들의 모든 재산과 정성을 기울여 예수께 봉사하였다고 한다. (참조, 마테 27ㆍ55ㆍ마르 15ㆍ41) 그리고 마테 25ㆍ42~44에서는 여러 종류의 애덕행위 즉 굶주리는 자에게 먹을 것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헐벗은 자를 입히고 병든 자와 감옥게 갇힌 자를 방문하는 등의 행위를「봉사한다」라는 동사와 연결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기독교인이라면 가장 미소한 자에게 이런 사랑의 행위를 베풀 때 곧 주에게 한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봉사한다」는 동상의 대상은 내가「너」이기 때문에 잘 보이기 위해서 이런 애덕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인「너」는 나에게 인격인으로 등장하며 나는 대화의 인격인인「너」와 같이 있고 이때에 나는「너」에게「봉사하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이다. 새로운「대화관계」를 예수는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고 이는 또 자신의 태도라고 선언하고 이를 따를 것을 요구한다.
(참고 마르틴 부버, 대화하는 생활) 이것이 곧 예수께서 루까 22ㆍ26ㆍ마르 10ㆍ43~45ㆍ마테 20ㆍ26~28에서 요구한 것이다.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자!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의 집권자가 알려진 사람들은 백성들을 강제로 지배하고 도 고관들은 세도를 부리고 있다. 그러나 너희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크게 되려고 하면 남을「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누구든지 주인이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가 온 것은 봉사 받으러 온 것이 아니다. 봉사하러 온 것이고 또 많은 사람을 위한 담보로 자기 목숨을 내 주러 왔다』예수는 자연적 질서를 거스르는 계명을 우리에게 요구함이 틀림없다. 자연 질서에 있어서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강자가 약자를 다스리는 것이 상례라면 예수는 이런 질서를 완전히 전복하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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