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시선이 두렵듯이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이 더욱 무서웠다. 그런데 여자가 입을 열기 전에 길 쪽의 문이 별안간 열렸다. 아까의 수녀가 들어선다. 그의 옷, 머리에 쓴 베일에 눈이 쌓여 갑자기 젊어 보였다.
『스잔느를 찾으러 왔어요. 우리집에서 편안히 쉴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나서 돌려드리겠어요. 피에르 신부님. 우리의 조용한 분위기가 그에게 좋을 거에요. 우리의 평화는 비록 부당한 것인지는 몰라도…스잔느, 이리 오세요. 』
수녀는 문간에서 다시 한 번 걸음을 멈추었다. 하이힐을 신고 짧은 치마 밑에 두 다리가 늘씬하게 드러나 보이는 스잔느 옆에 선 수녀는 아주 작아 보였다.
『삐갈 신부님, 난 주님의 나라에 이 여자와 함께 들어갈려고 해요. 』
제세마니의 밤 ⑦
피에르는 싸니 아랫대 친구들과 평화를 위한 모임을 끝내고 밤길을 돌아오는 길이다. 저녁 내내 눈이 오더니 이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순결 다음에 오는 슬픔, 이것은 죄의 모습. 차겁게 내리는 빗소리를 느끼며 피에르는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신발엔 물이 질벅질벅하고 옷도 벌써 여기저기 축축히 젖어 들어온다. 마치 바다 위를 걷는 기분이다. 28번지로 들어서자 피에르는 마당 안을 서성거리고 있는 사나이를 보았다.
밧줄에 매놓은 짐승처럼 일정하게 오간 발자국이 눈 위에 그려져 있었다.
『누구시오? 』
『마르셀이오! (에띠엔느의 아버지)』
『왜 들어가지 않고. 문이 열려 있는데…』
사나이는 대답이 없다.
『잘못한 줄은 아는 모양인데…』피에르는 속으로 생각했다.『무슨 일이라도…』
『레띠엔느 일이오? 』피에르는 큰 소리로 물었다.
『그렇소. 』그는 낮은 소리로 대답한다.
『뭔데? 빨리 자 들어와요! 』
불빛이 사정없이 마르셀의 얼굴을 내려 때린다. 사람의 살결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 얼굴, 거친 숨결은 악취를 내뿜고 알코올땀이 흐르는 듯했다. 눈물이 질벅거리는 두 눈엔 그래도 희미한 눈동자가 이 죽은 얼굴의 유일한 생명이다. 그러나 피에르는 쇠뭉치 같이 굳은 그의 두 주먹을 바라보았다. 시체를 바라보듯 조금도 정이 가지 않았다.
『그래 에띠엔느가 어떻게 됐소? 』
『떠나버렸소! 』
『아! 그래요』
『그럼 뭘 상상했소? 』
피에르는 대답이 없었다. 그의 두 눈이 무섭게 마르셀을 쏘아보고 있었다. 마르셀은 안색이 변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하다니 미쳤나! 』
『미친 건 자네요. 오래 전 자네한테 가서 말을 할려고 했는데…심지어 때려 주려고까지 했소! 그런데 오늘 저녁 자네가 우는 상을 하고 찾아왔군. 마르셀 자네는 못된 사람이오. 아주 못됐어! 』사나이는 어린애처럼 코를 훌쩍거렸다. 그는 아마 소리 내어 울고 싶었을 거다. 그러나 울 줄도 웃을 줄도 모르는 마르셀. 피에르는 갑자기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여보게 마르셀, 왜 애를 때리는 거요? 』
『자넨 몰라. 자네 생활은 너무 단순해서 모른단 말이야. 우선 자넨 방을 세 개 쓰고 있지 않나. 혼자서! 』
『마르셀, 난 혼자 있지 않네. 그렇게 단순하진 않아』
『자넨 일이 끝나 돌아오면 돌봐 줘야 할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고 이집 저집 다니며 식사를 하고… 종류가 다른 일일 뿐이야! 』
『피곤한 일이기도 하네, 마르셀. 』
『그러나 썩어빠진 방구석에 매일 속상한 일이 생기고 마누라는 바가지만 긁고. 』
『자네 같은 사람한텐 바가지 긁는 게 당연하지. 』
『그래, 당연해. 그렇지만 난 또 소리를 지르지. 그러다 나면 어떻게 되겠나 상상해 보게 하루 일이 끝나면 벌써 지쳐 있는데…』
『자네 부인도 마찬가지지. 』
『그래서 난 일찍 들어가고 싶지 않아. 자네도 내 입장이면 일찍 들어가지 않을 거야. 』
『난 자네처럼 선술집을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진 않겠어. 자네 몸에선 온통 술냄새가 난단 말이야. 』
『마시지 않곤 못 배겨. 자넨 힘이 세지만 난 앓고 난 후부터는 일이 힘에 겹단 말이야. 해낼 수가 없어』
『그럼 술을 마시면 된다고 생각하나? 』
『아무 생각도 안 해. 그저 두 시간 동안은 내가 행복하고 힘이 세지는 것 같고 사람들이 모두 친구 같이 보이거든. 두 시간 그거라도 어디야…』
『그래서 술에서 깨어나면 애를 때리는군』
『에띠엔느! 』
그의 비장한 목소리는 피에르의 가슴을 울리는 듯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목 쉰 소리로 계속했다.
『그 애가 날 깨운단 말이오. 그러면 한밤 중에 다음날의 고달픈 하루가 문득 생각나거든. 난 죽고 싶어져 피에르. 그 애는 어째서 큰 소리로 꿈을 꾸는 거요? 어째서 소리를 지르는 거요? 』
『자네가 때리는 꿈을 꾸는 거지. 마르셀, 그 애가 그렇게 얘기합니다. 자네가 그렇게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그 애가 천사처럼 조용히 자길 바라는 건가? 』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지? 시작이 잘 될 때는 모든 일이 저절로 잘 돼 나가지만 시작이 좋지 않으면 다 망쳐진단 말이야. 누구의 잘못인지조차 모르게 돼. 방이 두 개만 있더라도… 에띠엔느…』
그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지저분하게 코를 흘려가면서 울었다. 피에르는 물건처럼 바라보고 있는 자기를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만해 두게!…그래 에띠엔느가 어떻게 됐소? 』
『간밤에 들어오지 않았어. 틀림없이 아주 떠났을 거야. 두꺼운 쉐터도 안 가지고 갔으니…제르메느가 새파랗게 질려서 울고 있는데 그 애가 꼭돌아와야겠소, 피에르! 』
『병신들 만들어 버릴라고? 』
『물에 빠져 죽으러 간 것이나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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