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나 그의 제자들은 인간적, 정치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영광의 찬란함인 천국을 향해서 그들의 눈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광의 목적에 도착하기 위해 우리에게 제시된 길은 고통과 죽음을 지나야 갈 수 있는 길이다. 또 이상 기독교인의 숙명은 하느님이 당신의 나라로 불러모은 모든 이에게 적용된다. 드디어 고통의 깊은 뜻은「봉사함」에 있으며 봉사할 때 우리는 예수와 같이 고통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봉사하기 위해선 먼저 희생이 요구되며 기독교인이 위대한 사람 주인이 되는 길은 하나뿐이다. 이는 그가 모든 사람의 봉사자가 되고 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열두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맨 마지막이 되어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마테오 9ㆍ35) 그의 봉사는 희생과 고난과 죽음을 전제한다고 선언하였다. (마르꼬 10ㆍ44)
드디어 예수는 그의 행동과 말씀을 통해 인간적 위대함이나 계급의식을 완전히 파괴하고, 전복하였다. 예수의 말씀『인자가 봉사 받으러 오지 않고 봉사하러 왔다는』것은 종말론적 실재가 된다. 그리고 루까 22ㆍ26에서 말하는 봉사정신과 마르꼬 10ㆍ45과 마테오 20ㆍ25에서 소개하는 봉사정신의 큰 차이점은 먼저 텍스트에서는 식사에 시중을 든다는 영상을 통해서 이웃에게 애덕을 실천한다는 봉사정신을 표현하였다면, 후자에서는 봉사는 인간의 전 존재를 희생할 것까지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희생은 생명까지 버릴 힘이 있으며, 누구든지 이런 희생을 무릅쓴다면 그의 봉사정신은 죽음과 삶을 걸고 언제나 이웃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강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예수의 봉사정신의 가장 깊은 뜻이다.
(다) 이러한 봉사정신이 예수의 봉사정신이라면 그를 따르는 모든 제자들의 봉사정신도 역시 스승의 것을 준수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예수는 선언하기를『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그 목숨을 보전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에게 봉사하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의 봉사자도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에게 봉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일 것이다』(요한 12ㆍ25-26). 그리스도에게 봉사하려면 자신의 생명까지 버릴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복음의 봉사정신이다.
그리고 이웃과 그리스도와 성부를 섬기고 그들에게 봉사함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행동이다. 인간이 봉사할 때 비로서 성부와 일치할 수 있고 相交의 위대한 상급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또 성총이 우리에게 주는 신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기쁨인 것이다. 예수는 그러기에 인간으로서 또 신으로서 十字架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성부를 섬기고 봉사함으로써 인간이 하느님께 봉사하기를 거절한 죄를 보상하고 인간을 죽음에서 구원하였다. 예수는 그의 행동과 말씀을 통해서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에게 봉사해야하는가를 제시한다. 주인이시고 스승이신 예수께서 그의 성부께 하신 것처럼 인간은 이웃에게, 하느님에게 희생과 죽음과 삶을 걸고 봉사해야 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예수의 이 봉사정신을 깊이 또 철저히 알고 있었다. 이의 구체적 표현이 필립보서 2ㆍ6-11이다. 이 위대한 그리스도의 봉사정신의 찬가는 육적 길과 영적 길의 대립, 세속의 길과 복음의 길의 상반성을, 드디어는 그리스도의 봉사정신과 세상의 지배정신과의 근본적차이점을 잘 드러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의 찬가를 인용한다.『그는(그리스도) 본래 하느님의 본체이셨으나 하느님과 동등됨을 취하려 하시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였으며 사람의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자기를 낮추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그는 순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를 높이 올리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어 하늘에 있는 자나 땅 위에 있는 자나 땅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을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하고 고백하게 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이 찬가는 얼른 보기에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언급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모든 성서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육적 인간이 탄생한 첫째 아담의 태도를 암시한다고 한다. 첫째 아담은 피조물이고 하느님의 종인 인간 조건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즉 人間은) 하느님이 되기를 원하였고 지금도 원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에게서나 무엇에서 제한되기를 싫어하고 자기 자신의 위치 확보나 독립을 원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이 창세기 저자가 우리에게 소개하는, 인간이 하느님에게 순명하고 그에게 봉사하기를 거절하고자하는 유혹이다. 뱀은 인간 (아담) 에게 말하기를『너희들은 신과 같이 될 수 있고 너희 자신이 선과 악을 결단할 수 있다』고 하였다 (창세기 3ㆍ5ㆍ22) 그러나 신이 되고자 하던 아담은 벌거숭이의 죄인, 반역자로 추락한다 (창세기 3ㆍ11)
아담은 드디어 고통을 동반한 인생을 얻게 되고 관능의 노예가 된다. 인간은 따라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될 수 없으며 언제나 어떤 권력의 노예가 된다. 그가 신의 지배에서 이탈한다면 여러 권능의 지배에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원죄의 결과인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는 그가 신의 본성으로서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의 본성을 혼자만이 소유하고자 하는 태도를 취하지 아니했다.
그는 약탈품에 애착을 가지듯이 신의 조건에 애착하지 않고 인간의 노예 조건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가 인간적 노예상태에 있으면서, 그가 신이기 때문에 세상을 지배할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권리를 주장하지도 아니했다. 그는 겸손한 십자가를 통한 봉사로서 사랑 안에 자신을 낮춤으로 하느님에게서 군림의 권리를 얻으려고 했다.
그래서 첫 아담은 자기를 들어 높이기를 원했기 때문에 추락 하였음에 반해 둘째 아담인 예수는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였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리스도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어 하늘에 있는 자나 땅 위에 있는 자나 땅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을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였다. 이리하여 그리스도는 우리의「주」가 되었다.『너희 중 가장 훌륭한 사람은 남에게「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마테오 23ㆍ8-12 루까 14ㆍ11ㆍ18ㆍ14ㆍ2ㆍ48-53」이 말씀이 곧 예수의 봉사정신의 요약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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