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의 근원적 비극인 남북한 6·25 참전으로 인해 공산당에게 납치되어 행방불명이 됐거나 피살된 자가 성직자 신자를 막론하고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그 때의 이야기가 더러는 교회의 근대사나 혹은 다른 출판물을 통해 소개된 것도 있지만 아직도 사장된 이야기가 많은 줄로 압니다. 당시 그 분들의 정황을 목격했거나 혹은 전해들어 아는 분이 있다면 이 난을 통해 서슴없이 소개해 줄 것을 바랍니다. 이는 장차 우리 교회사에 귀중한 재료가 될 뿐 아니라 그 분들의 뜻을 기리고 넋을 추모하는 뜻깊은 일에 공한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편집자 주)
『어찌하여 신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루까 24ㆍ5) 하신 말씀이 생각날 때마다 우리의 존경하올 장 아네따(정온) 원장수녀님의 시체라도 찾아보려고 피살된 시체더미를 뒤지던 20년 전의 기억이 새롭게 되살아난다. 생명 자체이신 분을 찾으려고 무덤을 찾아갔던 제자들과 부인들처럼 우리도 (미련한 자들) (루가 24ㆍ25)이었다.
원장수녀님의 교훈과 정신이 우리 마음에 언제나 살아 있고 그분께 대한 우리의 존경과 사랑도 살아 있으니 시체 속에서 그분을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분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우리를 이끌어 주며 하느님께로 인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어머님 가신 지 20돌을 맞으며 몇 자 적음으로써 그분을 그리워하는 우리의 마음을 남기고 싶다.
1950년 5월 15일 우리 수녀들이 강제로 해산되고 수녀원은 몰수되었다. 수녀들은 모두 속복으로 갈아입고 본가로 돌아갔다. 뒷처리를 마친 원장수녀님과 나는 평양에 있는 내 조카집으로 갔다. 그러나 그 다음날 벌써 정치보위부원이 찾아와서 출두하라고 했다. 가톨릭 신자 성직자 수도자들이 다 공산당의 감시 대상이지만 우리 원장수녀님에겐 감시를 받을 또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오빠인 장면 박사께서「한국 정부의 유엔 승인」「주미대사」「6ㆍ25 때 유엔군 파견」을 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는 데 있다. 한마디로 우리 원장수녀님은 장 박사의 애국활동을 위한 희생의 제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한편 인품이 고결하시기 때문에 어떤 옷을 입어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었다. 그러기에 한시도 숨어 있을 수가 없고 감시의 검은 그림자가 뒤쫓았다. 5월 23일에는 전부터 잘 도와 주시던 종합병원 의사의 주선으로 원장수녀님은 입원하시게 되었다. 본래 약하신데다가 척추병이 있어 병 치료와 피신을 겸함이었다. 그러나 한 달이 채 못 가서 의사님이 군의관으로 징집되어 나가고 원장수녀님은 또다른 거처를 찾아야 했다. 이때 도와 주신 분은 진남포 조바오로 신부님이었다.
거기 있던 다위 수녀님이 모시러 오셔서 우리 셋은 진남포로 내려갔다. 그러나 닷새 후엔(6ㆍ24) 조 신부님마저 납치되어 가셨다. 이제는 정말 올 데 갈 데가 없게 되었다. 6ㆍ25 전쟁이 터지고 모든 형편은 어려워만 갔다. 평양으로 다시 가서 부모님이 월남하여 갈 곳이 없어서 신자의 집을 빌려 살고 있던 헬레나 수녀를 찾았다.
그러나 평양은 폭격이 심해서 피난을 가야 하는데 원장수녀님은 걸을 수가 없었다.
어느 여교우가 호의를 베풀어 원장수녀님을 리어카에 태워 서포까지 모셔다 주었다.
정든 서포수녀원을 보면서 근방의 프란치스카 수녀님 댁에서 하루 쉬고는 다시 용궁리 공소 회장 댁으로 피신하셨다. 20일 이후에는 다시 송림리 공소 회장 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여기도 뒤쫓는 그림자가 있었고 스파이 노릇 하는 집이 있었다. 국군은 북진을 탈환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얼마 후엔 자유 세상을 보게 될 것이라고 희망을 가져 본다.
그러나 이북의 정세가 악화되면서 단말마적인 최후의 발악이 시작됐다.
아ㅡ 꿈에도 잊지 못할 10월 4일, 날이 밝자마자 사람이 왔다.
군사동원부의 명령이니 모두 나와서 나무 찍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원장수녀님은 환자이시고 나는 간호를 해야 하므로 나갈 수가 없고 헬레나 수녀님만 일하러 나갔다.
오전 11쯤 됐을 때 동리의 세포위원장이 찾아와 일하러 나오지 않는다고 재촉한다. 환자를 놓고 어떻게 일할 수 있느냐고 했더니 30리나 떨어진 순안에 가서 진단서를 해 오라고 한다.『보시다시피 중환자가 어떻게 먼 길을 갈 수 있습니까?』『그러면 대리로 가서 진단서를 해 오시오』『그렇게 하지요』하고는 진단서를 하려고 오후에 집을 나섰다.
10분쯤 생각해 보니 그의 계책에 넘어가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되돌아와 원장수녀님께 말씀드렸더니『그렇지야 않겠지』하시면서 나를 안심시켜 주셨다. 우리는 묵주의 기도를 드리면서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바로 이때 밖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린다.『이 집이 반장 댁이오?』『여기 장정온 있소?』내다보니 인민군 장교 2명과 사복한 사람 하나가 달구지를 끌고 왔다.『우리는 군사동원부에서 왔소. 평양 내무상의 특명이요. 장정온 씨는 의학과 간호학에 능하며 다방면에 재주가 있다 하니 어려운 이 때에 이런 인재가 필요하오』『이 분은 의학과 간호학을 모르며 보시다시피 지금은 중환자여서 갈 수가 없습니다』『환자가 이런 벽촌에서 치료도 못 받고 있으니 순안의 큰 병원에서 치료하여 나라에 봉사케 하겠소』『이 분의 병은 안정과 휴식이 필요합니다』이렇게 한 시간 이상을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원장수녀님이 나를 부르신다.『베드로 수녀님! 가겠습니다. 주님의 뜻입니다.』『안 됩니다. 가시면 안 됩니다.』하고는 다시 나와서 말을 해 보았으나 사정이 통할 리가 없다. 꼭 잡아 가려는 사람과 절대로 보낼 수 없는 사람 사이엔 말이 통할 수가 없는 것이다.『내가 대신 가겠소』『당신은 필요없소』『나는 어디든지 따라 갈 것이요』가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신 원장수녀님은 옷을 갈아입으셨다. 그리고 기브스를 붙이자 그들이 달려들어 달구지에 실었다.
달구리를 덜컥거리며 어두워가는 산골길을 내려간다. 나도 따라 나섰다.
『베드로 수녀님! 어디를 따라와요. 나는 가야 할 사람이니 할 수 없지만 수녀님은 아예 따라올 생각을 말고 후에 수녀원을 계속해야 합니다』원장수녀님은 애원하고 인민군 장교는 윽박지르다 못해 총부리를 들이대고 가로막는다. 달구지 소리와『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시는 원장수녀님의 기도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에 흐느끼고 있었다. 어두움은 짙어가고 별빛도 없다. 과연『지금은 너희 때요. 어두움의 세상이다』(루까 22,53)
이때 헬레나 수녀님이 일을 마치고 동네 처녀들과 돌아온다. 오는 도중에 달구지가 지나가며 비키라고 해서 모두 옆으로 비켰는데 달구지에서 신음 비슷한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불길한 마음으로 돌아오다가 나를 만났다.
이 슬픔을 무엇으로 다 표현할 말이 없다. 다음날 일찍이 둘이서 순안 정치보위부에 찾아가 알아보았으나 아무도 안다고 하는 이가 없다.
할 수 없이 저녁 때 방지가 수녀님 집으로 갔다. 거기 머물던 까리따스 수녀님과 함께 넷이서 슬픔의 바다를 이루었다. 얼마 후 10월 19일 국군이 평양에 입성했다. 종군신부님들도 들어왔다. 원장수녀님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국군이 들어오기 2ㆍ3일 전에 반동분자로 수감돼 있던 사람들을 공동묘지 부근으로 끌어내다가 모조리 총살시켰다는 말을 듣고는 수녀들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시체들을 하나씩 모조리 뒤져 보았다. 송장 냄새가 고약해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올 것이다.』(요한 13ㆍ36) 우리는 어머님의 교훈대로 삶으로써 어머니를 따르며 거기서 어머니를 뵈올 것이라 믿으며 한결같이 살아온 세월 20년이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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