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화와 합리주의
그러나「감동」의 문제인 원초적 복음화의 개념은 오늘날 합리주의에 의해 밀려나고 있는 것 같다. 합리주의는 기적을 원시과학인 마법과 같은 범주에서 다루고 있다. 기적이란 일정한 선행조건을 부여하면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인과관계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과학인 마법과는 달리 정상적인 인과적 연쇄에 반하여 혹은 그것에도 불구하고 결과를 얻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유신론적 합리주의는 성서 상의 제 기적 중 일부는 과학적으로 해명해내고 있고 나머지는「미과학」으로 남겨두고 있다. 예를 들면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라디에스테지의 이론에 의한 기적의 해명이 그것이다. 즉 현대적 합리주의는 절대적인 초과학적 기적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인정하고 들어가지 않는다. 아직 해명되지 못한 것은 미과학으로 간주할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 합리주의의 자기모순이 있다.
가령 미래예견의 능력은 과학적으로 해명될 수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어떤 근거에 의해서인가? 라디에스테지의 미래예견의 점술을 해명하는 방사자력(放射磁力)과 탐자력(探磁力)이란 근거는 결국 하나의 가설이며 그것은 철학이라는 영역에 둘러싸여 있다. 즉 가설의 기능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과학은 절대과학인가 하는 문제를 규명하는 것은 철학의 과제인 것이다. 과학이 일단 철학의 영역으로 돌아가면 과학점술이 비과학적이라고 단정하는 것들마저도 과학점술과 동일한 범주에 들게 된다. 예컨데 무당의 점술을 과학점술사는 비과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과학점술도 결국은 통계에 의거하지 않을 수 없는 가설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절대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체는 비과학이거나 아니면 미과학이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미과학을 합리적으로 해명하지 못하는 현대과학은 미과학이 완전히 해명될 때까지는 절대과학일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절대과학을 인정치 않을 경우 비과학과 미과학, 과학의 한계라는 건 막연해진다. 우리가 성서 상의 제 기적을 미과학으로 단정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과학화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믿는 것이며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로 가정적으로 믿는 셈이다. 결국 우리가 합리에 의지하겠다면 성서적 하느님 계시종교는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될 국면에 이르게 된다. 한편 기적을 비과학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과학외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셈이다. 따라서 기적은 과학이 해명할 수 없는 어떤 딴 세계의 소관이 되는 셈이며 그것을 과학외적이라고 비웃을 수는 없을 것이다.
기적은 초과학이며 그것은 새로운 과학(Technic이 아닌 Science)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이 과학은 합리주의의 산물은 아니다. 계시과학이다.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직관의 과학이며 성서과학이다.
이것은 텅 빈 공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성에 의해 논증될 수 없고 성령에 의해 직증될 수 있을 뿐이다. 성서가 이를 상기시켜준다.
「…거룩하신 분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두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어온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십시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어온 것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살아있으면 여러분은 아들과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이 증언을 자기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입니다…」(요한의 첫째편지에서)
성령의 직증여부는 하느님의 아들을 믿어보면 알 수 있다고 직증자는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을 뒤집어 보면 하느님의 아들을 믿지 않으면 성령의 직증여부는 알 수 없고 단지 혼돈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 문맥에서 보면「와서 보라」고 한 예수의 말씀이 잘 이해된다. 우리가 기적을 초과학으로 규정하지 않을 때, 그리고 기적을 규정하는 과학을 계시과학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부활은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남는 것은 형이상학뿐이다. 그런데 기적을 허공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성으로 설명해치운 후 이 기적 아닌 과학 창조주의 섭리라는 결론을 향해 논리를 귀착시킬 수 있을까? 그러나 이렇게 되면 우리는 중대한 난관에 빠지게 되니 창조주란 관념이 어떻게 하여 생겨나게 되었는가 하는 원천적인 물음으로 되돌아가서 얘기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합리주의는 기적을 인과적 연쇄에 의한 자연사로 규정하므로 성서적 하느님과는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결과는 아리스토텔레스에로의 복귀이다. 만약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과 계시의 신학이 조화될 수 있다고 생각해온 오랜 착오로부터 벗어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진부한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담의 하느님은 형이상학적 실체는 아니었다. 만약 아브라함의 하느님이 철학자의 하느님이었다면 선택된 역사도 복음도 무의미한 그런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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