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모자라는 쇠붙이를 보충하기 위해 소위「고철헌납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기 시작했다.
말이 헌납운동이지 사실은 가가호호를 뒤져 심지어 숟가락까지 걷어가는 강제수집이었다.
밥그릇에 숟가락까지 걷어가던 일제의 눈에 수백개 교회에 달린 묵직한 종들이 안 보일리가 없었다.
종을 떼어 천황폐하께 헌납하라는 고등계 형사의 집요한 재촉과 무슨 구실을 대서라도 종을 보존하려는 신부 사이에 벌어지곤 했던 촌극들을 살펴보자. 1944년 10월 논산본당에서 있었던 얘기.
양평 선교리본당에서 새로 부임해온 신부는 아직 종이 그대로 매달려있는데 다행을 느끼며 이곳은 평양보다는 덜 볶아대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채 일주일도 지나기 전에 그곳 재향군인회 회장이란 자가 나타나 예의 종 얘기를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앞서있던 불란서 신부가 워낙 고집이 센 사람이라 종을 걷어가지 못하고 있던 판에 조선인 신부가 새로 왔다니 이젠 협박을 해서라도 떼어가보겠다는 속셈이었던 것. 천하가 저희들 것 인양 날뛰고 이미 경향 각지에서 종을 내놓은 교회가 많은 터에 못 내놓겠다고 버티면「비국민」(非國民)으로 몰리게 되니 못 내놓을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워야한다.『그런데 제가 와서 살펴보았더니 이곳 종은 불란서에서 만들어온 큰 종이라서 종각을 헐지 않으면 떼낼 수 없게 되어있어 참 딱하게 됐습니다』종을 가져가려고 종각을 헌다는 건 아무리 염치없는 일제이지만 체면이 안 서는지 그 자는 더 이상 요구하지 않고 돌아갔다. 그런데 이 성당은 지대가 약간 높아 경계선 옆에 있는 신사를 내려다보는 위치였다.
일제는 이것을 트집잡아 물고 늘어졌다. 하루는 고등계형사가 찾아와『성당이 신사보다 높은데 이것은 신사에 대한 불경(不敬)이니 성당을 헐기 곤란하면 종각만이라도 헐라』는 것이다.
우리 손으로 헐기는 싫으니 너희들 손으로 종각을 헐고 종을 내놓으라는 얘기다.
『제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성당은 바티깐 교황청 소유로 되어있어 제 권한 밖의 일입니다. 그러나 교구청을 통해 교황청에 상신은 해보겠습니다.』
궁하면 통한다고 이럴 때 신부의 머리는 회전속도가 빠르다.
교황청에 상신할 리도 없지만 설사 상신한다면 대일본제국에 대한 대외여론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형사가 모를 리 없다.
신부는 이것을 미리 계산한 것이다.
그러나 두번 도끼질로 물러설 일제가 아니다.
한동안『비국민 신부 잡혀갈 것』이라는 소문이 돌더니 이번에 징집 통지서를 내보내는 것이었다.
결국 신체검사에서「치질」로 판정을 내리게 본당 회장이 손을 써 이 방법도 좌절이 되자 이듬해 봄 헌병대에서 성당을 병원으로 쓰겠으니 비우라는 것이었다.
못 비우겠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성당 사무실에 이어 주일학교 교실을 요구 이것도 거절하자 그러면 집을 짓게 성당 마당을 빌려달라고 협상해왔다.
이것마저 거절할 수 없는 궁지에서 이왕 전세는 일본에 기울어져 곧 전쟁이 끝날 것을 알고 있는 신부는 실리(實利)를 찾기로 했다.『빌려드리지요. 대신 대 일본제국이 전쟁에 이길 것은 뻔하니 그때 쓸모없는 그 집은 성당에 넘겨주는 조건입니다』그러마하고 물러났던 일제는 그 뒤 소식이 없었고 얼마 후 전쟁은 끝나 일본천황이 울며 항복을 선언하던 날 종은 침묵을 깨고 낭보(朗報)를 전했다.
1943년 여름 신의주본당.
시내 13개 각 교파 교회에 달렸던 종이 다 걷혀가고 오직 성당종만 최후보루처럼 달려있었다.
역시 종을 두고 신부와 고등계형사 사이에 입씨름이 벌어졌다.
『오늘 중으로 종을 천황폐하께 헌납 하십시요』
『아니 천황께 그런 모독이 어디 있습니까』
『모독이라니 무슨 말이요』
『일본 헌법에 천황은 신성불가침이라 했오. 그런 천황께서 이 종을 걷어다 대포를 만들어야 승리한다니 천황능력에 대한 모독이 아니고 무엇이요』
『………』
『그리고 이곳은 수풍발전소에다 만주로 통하는 압록강 철교가 있어 미ㆍ영 비행기가 폭격할 것은 뻔하지 않습니까. 그때 사방멀리까지 들리는 이 종을 울려대면 시민들이 피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당신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니 잘 생각해보시요 그래도 꼭 헌납해야 한다면 바치겠오만…』
『그렇기도 하군요』
『그러니 제가 말씀드린 전략상의 이유에서 이 종만이라도 그냥 놔둡시다』
『좋소. 그러면 이 종은 그럴 경우에만 우리 경찰서 지시에 따라서 쳐야하오』
『그런데 경찰에서는 이해해도 헌병대나 다른 곳에서 또 오면 곤란하니 아예 신문지상에 이 사실을 공포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날 저녁 신의주에서 발행되는 압강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국가 기밀에 관한 것이니 천주교 종에 대해서 헌납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자 하는 자는 신의주 경찰서 고등계로 오라. 만일 신부에게 직접 가서 괴롭히는 자 있으면 단호히 조처하겠다」
신부의 기지가 아니었던들 대포의 포신으로 변했을 신의주 성당종도 이렇게 위기를 넘기고 해방을 맞던 날 국경 넘어까지 그 청명한 울림으로 해방의 기쁨을 전했다.
그러나 성당종이 다 이런 식으로 무사했던 것은 아니다.
그때 본당 신부들은 전 성당의 반 정도는 강압에 못 이겨 헌납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종각을 헐어야 꺼낼 수 있는 명동대성당 종은 종각을 원형대로 복구해야한다는 조건 때문에 걷어가지 못하고 대신 놋쇠로 만든 제대 난간만 뜯어가 그 후 나무로 만든 난간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런 사정은 개신교도 마찬가지여서 1942년 10월 15일 현재 강제공출된 종은 장로교회만도 1540개로 총액 11만9천8백32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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