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잡지」만으로 명맥을 이어오던 가톨릭 잡지계는 1933년 6월 「가톨릭 청년」 창간으로 다소 활기를 띠는듯 했지만 「가톨릭 청년」 내용이 당시로선 좀 높은 수준이어서 일반 신자들로부터 기대한 만큼의 관심을 얻지 못했다.
제왕의 자세로 군림하는 「경향잡지」의 권위에 식상(食傷)한데다 「가톨릭 청년」으로 부터도 소외당한듯한 느낌속에 좀 흥미있게 읽을수 있는 잡지가 기대되던 이 시절, 이때 혜성과 같이 나타나 이북지방을 휩쓸었던 잡지가 1934년 평양교구 발간한 월간 「가톨릭 조선」이었다.
「경향잡지」의 관보적이며 교도적인 편집 자세가 기관지로서 권위를 갖기에는 족했지만 잡지로서 아기자기한 맛을 느끼기엔 너무 딱딱했던 「가톨릭 청년」은 새로운 신학소개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신자들로선 소화하기 힘든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것은 당시 가톨릭 잡지계의 약점이 될수 있었고 두 잡지의 약점을 보완, 대중지로서 출발한 것이 「가톨릭 조선」이었다. 「가톨릭 조선」은 처음 「가톨릭 연구 강좌」라는 이름의 강의록 형식으로 발간되었는데 창간 동기는 이러하다.
평양교구는 1933년 3월 교구장 목(睦) 요한 주교가 주교회의에서 「가톨릭 진행회」 위원장에 피선됨을 계기로 교구 가톨릭 운동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그 해 가을 교구의 전교회장ㆍ교리교사 180명을 대상으로 1주일간 서포(西浦)성당에서 「종교연구 강연회」를 개최했다.
그런데 이 강연회에 만족한 참가자들은 마지막날 연회 석상에서 목(睦) 주교에게 강연회 내용을 책으로 엮어 줄 것과 매월 새로운 교리지식을 담은 책자를 발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목(睦) 주교는 강연회 연사로 나왔던 홍용호 김성학 신부와 김구정씨 등과 협의끝에 다음해인 1934년 1월 「가톨릭 연구강좌」를 내놓았다.
「가톨릭 천년」창간 6개월만이었다. 「가톨릭 연구강좌」는 창간사에서 『「가톨릭 청년」은 예기(銳氣)와 의협에 찬 포교전선의 돌격대라면 「경향잡지」는 그 역사와 자태로 보아 노련한 전략가이다.
우리는 그런 지략은 없으나 저들에게 갑옷과 군량을 보태어주며 가진 창검을 항상 날카롭게 갈아주는것』이 사명임을 천명하고 나섰다.
이런 선언대로 이 잡지는 성사 순교사 호교론 교회사 예전 주일학교 교재 등 신자 교육에 필요한 내용과 국내외 교회뉴스ㆍ시ㆍ소설ㆍ육아상식 등 일반 신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편집과 내용으로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종교지의 약점을 벗어나 종교 대중지로서 체계를 잡아갔다.
이렇게 3년 게속되는 동안 평안남북도 황해도 함경도를 위시해 멀리 북간도 신자와 성직자 사이에 크게 환영을 받기 시작하면서 인기는 점차 높아갔다.
운영면에서도 지대와 광고수입만으로도 흑자를 낼 만큼 반응이 좋았다. 「잡지다운 잡지」를 만들기로 하고 체제를 대폭 정비 37년 1월 초부터 제호를 「가톨릭 조선」으로 바꾸고 면수도 종래 1백페이지에서 165페이지로 증면하는 한편 10전(錢)(1년1원)하던 잡지대를 15전으로 인상했다. 게다가 「가톨릭 청년」이 폐간되면서 조선교회 공용지로서 주교회의 공인을 받게되니 「가톨릭 조선」으로선 최성기를 맞은 셈이었다. 「가톨릭 조선사(朝鮮社)」는 평양 관역리 성당 구내에 있는 5평 남짓한 사무실을 쓰고 있었는데 사장 홍용호 신부와 주간 김구정씨가 편집을 맡아 전국에서 들어오는 원고를 밤새워 정리하는 한편 지면의 반 이상을 메워갔는데 필재 좋은 두 사람은 4~5개의 필명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했다. 그런데 가톨릭 연구의 이러한 성장은 33년 주교회의 결의에 따라 「가톨릭 청년」을 발간하던 서울교구로선 탐탁치 않은 일이었다. 당초 5교구장의 공인과 후원을 힘입어 출발한 「가톨릭 청년」입장에서 볼 때 「가톨릭 연구강좌」는 「비합법적 존재」이며 라이벌로서 운영에도 심각한 타격이 아닐수 없었던 것. 그렇다고 주교회가 어떤 제재를 가할 성질의 일은 아니다.
이렇게 되자 서울교구는 재정적 이유와 조선교회를 출판물의 통일을 위한다는 이유를 세워 36년 12월호를 끝으로 자진 폐간하고 말았다. 이때 「가톨릭 연구강좌」발행부수는 1천5백부를 상회하고 있었다. 「가톨릭 청년」의 「가톨릭 연구강좌」에 대한 서자(庶子)취급의 가시돋친 폐간사가 나오자 「가톨릭 조선」으로 개제한 37년 1월호에 「가톨릭 청년 폐간에 제한 우감(偶感)」이라는 제하의 반박을 장장 7페이지에 걸쳐 실었다. 즉 「가톨릭 조선」이 「가톨릭 청년」발전을 저해한다는 말은 수긍하나 두 잡지의 성격이 다른 이상 다소 장애가 있다 해도 그것은 「가톨릭 청년」만을 위한 독자 획득에 관한 협소한 이해관계인뿐 두 잡지의 병립은 대국적인 견지에서 오히려 가톨릭 잡지 독자층은 넓힐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며 주교들의 출판물 통제안은 결코 「가톨릭 청년」 외의 출판물 금지가 아니라 가톨릭적 출판이면 네 것 내 것 없이 의기 상통하여 보급에 힘써주어 가톨릭 문화 보급에 힘쓰자는데 있는 것인데 같은 잡지로서 웬 잔소리가 그리 많으냐는 것이다. 그리고 「가톨릭 청년」이 독불장군식 정신을 버리지 못한데서 온 쓸데없는 희생을 슬퍼하노라고 쏘아 부쳤다. 「가톨릭 청년」으로서도 더 할말이 있었겠지만 이왕 폐간한 후인지라 두 잡지의 싸움은 여기서 끝나지만 감정은 오랜 여운을 남겼다.
그것은 일종의 불매운동이었다. 다시 「가톨릭 조선」의 보급업무를 맡았던 김관택씨(현 평양교구 신우회회장)의 회고에 의하면 서울지방은 발붙이기가 힘들어 성직자들이 공공연하게 적대감을 나타내 회장들을 상대로 몰래 독자를 얻곤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본당의 주임신부는 본당 대문도 못넘게해 돌아선 적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가톨릭 조선」도 교구 재정사정과 당시 구하기 힘든 종이사정으로 면수를 줄이면서 연명하다 1938년 12월호를 끝으로 폐간하고 말았는데 그때 이 잡지를 읽었던 사람들은 지금도 「볼만한 잡지」였다고 말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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