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맑고 투명한 계절이 돌아왔다.
일 년 사시는 다 제 나름의 모습과 아름다움으로 사람의 마음을 감동케 하는 것이로되 가을만큼 계절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없는 상싶다.
여름 내내 드러내 놓은 살갗을 부드러운 입성으로 가려 우선 우리 육신의 모습이 단정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철이면 우리의 영혼까지도 희게 바래어져 맑고 깨끗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러길래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가을이면 더욱 유적해지고 등불을 돋우어 책을 읽고 깊은 사색에 잠기고 하였는가.
가을을 일러 흔히「조락의 계절」이라 함을 듣는다. 이는 아마도 가을의 쓸쓸함과 처량함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득히 영글은 오곡백과를 거둬들인 뒤의 빈 산야, 짙푸르게 무성하였던 녹엽들이 붉게 누르게 물들어 지천으로 떨어져 쌓인 위에 찬 빗줄기라도 뿌리는 밤이면 아닌 게 아니라 가을은 구슬프고 씁쓸한 계절이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우주만물이「가득 채움」에 앞서「온전히 빈 것」이 그 의미라고 한다면 쓸쓸한 가을의 모습이야말로 어쩌면 자연미의 진면목(眞面目)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또한 검은 먹으로만 그린 동양화에서 보는 것과 같은 여백의 아름다움을 가을에 발견한다. 온갖 색채와 윤기로 현한하던 봄 여름 기억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꽃 피고 새 우는 천지, 푸른 숨결 드높은 녹음의 천지는 얼마나 아름다우며 얼마나 즐거운가.
그러나 상상한 가을 바람이 옷깃으로 스며들 때 가을 나그네 되어 여행을 떠나본 사람이라면 가을의 황량함이 주는 격조 높은 아름다움을 문득 발견하고 놀랄 것이다.
아득한 회색의 들판, 미루나무 위의 빈 까치집, 풀숲 같은 흰 머리를 바람에 풀고 섰는 억새풀 무더기, 우리 마음을 흔드는 그 쓸쓸한 표정의 신비한 매력을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가을을 사람으로 치면 고결한 선비의 풍모라고나 하면 싱싱하고 발랄한 젊음의 고비를 이제 막 넘어서 더욱 무겁고 그윽한 깊이를 지니는 여인네라고나 할까. 철 없는 젊음도 아니요 적막한 노년도 아닌 실로 원숙한 아름다움이다.
그 안정감과 조용함이 우리를 이끄는 힘은 큰 것이어서 가을철이 올 적마다 나는 덤벙대던 생활의 자세를 다시 한 번 가다듬곤 한다. 좀더 참되게 살아야겠다는 의식이 강렬하게 솟아나며 자꾸만 상실되어 가는 자기를 되찾고 싶어진다. 진정 가을이 나를 교훈하고 깨우치는 바는 크고 많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자연의 변이도 온 우주를 창조하식 주재하시는 신의 섭리일진대 그 전능의 힘과 가이없는 사랑 앞에 그저 묵묵히 고개 숙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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