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탈한 것처럼 미사는 멍하니 앉아있었다.
태 사장은 연거퍼 발달된 현대의학으로서는 결핵이란 조금도 어려운 병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유급휴가에 대해서도 조금도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점 등을 역설하면서 미사를 위로하고 떨어진 사기를 돋구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태 사장이 미사를 모르기 때문이다.
X레이가 나쁘다는 사실은 미사에게 뜻밖이라는 인상을 주었을뿐 충격을 주지는 않았다.
삶의 애착을 느끼지 못하는 탓인지 미사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 미사는 유급휴가가 내렸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있는 길이었을 뿐이었다. 태 사장의 처사는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미사로서는 조금도 반가운 처사가 아니었다.
미사에게 출근을 금지하고 휴가를 준다면 그녀는 아파트방에 갇혀서 흡사 수인(囚人)같은 세월을 보내게 될 것이다. 꼼짝없이 방 속에 갇혀서 그녀가 벗삼을 것이라곤 오로지 전축과 알콜정도 이리라.
10년 전에 미사와 부녀의 인연을 끊은 아버지는 일년 전에 가족들을 거느리고 브라질 이민을 떠나버렸다.
이따금씩 집안소식을 날아다주곤 하던 동생 미리도 떠나갔고 마음속 후원자였던 큰오빠네 내외도 미사의 위안이던 조카 현이도 모두 떠나버렸다.
아버지 밑에서 기를 못 펴며 평생을 산 어머니는 미사를 혼자 남겨두고 떠날수 없다고 눈물로 호소했다지만 군인기질이 투철한 아버지는 어머니의 청마저 묵살해버렸다.
그들은 떠나버렸다. 미사만을 남겨둔채…
또한 미사는 아직도 이웃에 대한 공포심을 버리지 못한다.
자연히 문을 닫아걸고 두문불출할수 밖에 없었다.
미사의 경험으로 본다면, 방이란 잠만자는 데라야 한다.
방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된다.
생각하기도 싫은 과거의 얼굴들과 다시 만나야 되고 싸워야 되고 피를 흘려야 된다.
이제는 흘릴 피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유 박사네 병원으로 가기로 하고 사장실에서 나오니 비서실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밖에서 차가 기다리고 있어요. 타고 가십시요.』
마치「X레이가 나쁘다지요? 안됐습니다」하는듯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사무적인 투로 명랑하게 말했으나 어쩐지 속이 메스꺼웠다.
어쩐지 남들이 지나친 동정심을 베푸는 것 같아 계면쩍고 자존심이 상했다.
차 시트에 기대어 바람처럼 스쳐가는 밀집된 거리를 멍하니 내다보고 있으려니 뜻밖에도 구슬알 같은 눈물이 후루룩 떨어졌다.
왠일일까.
조금도 슬픈생각을 한 것도 아닌데…
미사는 자기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당황했다.
자기도 모르게 퍼뜩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는걸 보니 자기 주제에 어울리지도 않게 외로움을 느꼈던 것일까.
운전사는 미사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유 박사네 병원 앞에 와 멎는다.
병원 문을 여니 짙은 크레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언제와도 병원이라는 곳은 섬찟하기 마련이다.
대기실에 사람이 북적거렸다.
대뜸 원장실로 통할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미사는 그러지 않을 작정이었다.
진찰권을 사가지고 대기실 벤치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환자들은 저마다 괴로운 표정으로 순번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을 부축해온 건강한 사람들은 긴장한 얼굴로 여러가지 사무절차를 밟거나 약국에서 약을 타거나 하느라고 부산스레 오가고 있었다.
확성기에서 환자 이름을 호명하고 있었다.
아직 미사의 차례가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것만 같았다.
전혀 알지 못하는 환자들 사이에서 순번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미사의 마음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게 되는것 같았다.
그러나 갑자기 호명을 받았을때 미사는 어리둥절한 눈길로 사방을 훝어보았다. 확성기에서 연거퍼 미사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한미사씨 한미사씨 곧 원장실로 오시기 바랍니다』
미사는 일어섰다.
기다리고 있던 환자와 그들의 가족들의 눈길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만 같아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죄진 사람처럼 그 앞을 스쳐 나왔다.
복도를 지나가는 간호원에게 물으니 원장실은 이층이라는 것이었다.
원장실 문을 살그머니 열었다.
문 옆에 앉아있던 비서가
『한미사씨죠?』
웃는 얼굴로 맞이해준다.
『들어가세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미사는 또 다시 낯을 붉혔다. 지금까지 자기에게 무관심하던 사람들이 그녀가 결핵환자로 판명됨과 동시에 일제히 관심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미사는 약간 딱딱해지는 표정으로 원장실 문을 열었다.
『어서오세요』
시원하고도 굵직한 유 박사의 목소리가 그녀를 맞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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