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무엇이…? 』
『예를 들면 비어 있는 헛간 같은 것』
침묵이 흘렀다. 청년은 고개를 숙였다. 피에르는 다시 입을 열었다.
『또는 두 시간씩 창구 앞에서 기다리는 것, 밤을 새가며 글자 하나 모르는 사람의 서류를 만드는 것, 처음에는 거절하는 것을 얻으려고 네 번씩 같은 곳에 가서 떼를 쓰는 것 등등 많은 걸음과 많은 시간의 낭비와…』
『시간이 돈이지요. 』
『그게 그렇지 않소. 돈 빼놓은 다지요. 돈은 별로 대수로운 것이 못 되오. 』
『아버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던데요. 』
『농담이 아니오! 』피에르는 냉정하게 말했다.『당신 아버지가 전날 서명한 약속을 다음날 파기해 버린 사건을 말한다면 나도 알고 있소. 참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하오. 』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당신은 우리 아버지의 노동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
『난 노동자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상관이 있소. 』
『아닙니다! 연대의식(蓮帶意識)이라는 것은 우선 같은 공장 안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당신이 우리 노동자들과 가깝기보다는 우리아버지가 훨씬 더 가깝습니다』
『만일 그런 연대의식이 있다면 당신 아버지는 휴가도 가지 않고 자동차도 없을 거요. 작업장을 일부 폐지해 버리기 이전에 자기 집의 일 부분을 빌려 줄 거요. 그런데 당신 아버지가 노동자들을 내쫓아 버리면 그 사람들은 날 보러 오거든요. 내가 도와 주기를 바라고 그 사람들은 내가 자기네들과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거요. 』
『모든 것이 삐둘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지요』
청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좀 앉아도 되겠습니까? 』
『모든 것이 삐뚤어져 가고 있소. 그러면 당신 생각에는 그것이 그 가엾은 노동자 탓이라고 생각하시오? 마흔 살이나 되는 나이에 한 달에 천이십 프랑밖에 벌지 못하고 방 한 칸에 마누라와 아이 셋이 살아야 하는 그 사람들의 탓이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
『아버지 말씀은 노동조합이 모두 망쳐 놓는다고 합니다. 』
『늑대는 양떼만 만나야 하는데 사냥개가 다 망쳐 놓는단 말이지! 』
청년은『무슨 뜻…』하더니 말을 끝 맺기 전에 상대방의 말하고자 하는 뜻을 알아차렸다.
『그래도 연대의식으로 하는 등 맹파업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지금은 노동조합이 참견 안 하는 데가 없군요』
『지금은 그렇소. 그러나 예전과 지금 사이에 당신네들이 저지른 잘못과 부정이 얼마나 많았소! 』
『당신네들이라니요? 당신은 계급 투쟁을 하는군요. 』
『겨울에는 차디찬 눈에 대항하고 여름에는 뜨거운 햇빛에 대항하는 사람 그것이 좋지 않소. 여보시오. 명백한 사실에 반대해 보았자 별수 없소! 』
『난 그렇게 생각할 수 없어요. 물론 당신은 내가 잘 먹고 용돈도 많이 쓰고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을 때까지 공부도 조용히 할 수 있는 팔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는 일어섰다) 사람이 완전히 두 패로 갈라져 있다고 생각하시지요? 부르조아, 기업주, 당신의 원수 이런 식으로? 유전병 등등? 천만에! 노동자보다도 돈을 두 배나 적게 쓰는 늙은 교수, 파산한 기업주, 또 신부님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까? 』
『이니오. 』
피에르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건 돈만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당신이 아는 늙은 교수나 그런 사람들은 적어도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는 세 가지 재산을 가지고 있소. 존경과 교제(交際)하는 이웃과 문화(文化)를 가지고 있소. 자기 뒤에 아무런 문화도 전통도 없는 사람의 정신상태를 상상해 보시오. 앞에는 항상 기계와 대결해야 하는 생활밖에 없고…! 』
『벌써 생각해 보았어요』
『당신 아버지도? 』
『몰라요. 우린 그런 얘길 해본 적이 없으니까』
『물론이겠지요. 그런 얘기를 하면 예의에 벗어나니까. 아니면 당신을 공산주의자로 취급할 것이고 또 당신은 자기 가족을 배반하고 배은망덕한 것 같은 기분이 나겠으니까. 』
『사실 그렇지요. 』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니 결국 해결책이 없는 것이 아니오? 』
『그런데 신부님…』
피에르는 청년이 다정하게 부르는 소리에 놀랐다. 청년은 잠시 묵묵해지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신부님 착한 주인이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시지 않어요? 』
『틀림없이 있을 거요. 』
『노동자들과 일체가 되는 주인이 있겠지요 마치 장교들이…』
『장교는 전쟁터에서는 부하들과 일체가 되지요. 죽음 앞에 서니까. 그러나 임금을 적게 받고 더러운 데서 살고 저축도 안정도 장래 계획도 없는 기업주란 있을 수 없소. 』
『그런 기업주가 있으면 공장도 끝장나는 거지요. 』
『그럴지도 모르지요. 』
『그런데 노동자도 좀 계산을 해서 앞날을 생각하고 저축할 순 없나요? 』
『안 되오. 』피에르는 엄숙하게 대답했다.
『절대로 되지 않지요.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로 벌고 다음날 파면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 하루에 수천 번 똑같은 몸짓을 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저녁에 돌아와서 계획을 세울 수 있겠소? 영화관에 타잔을 보러 가든가 아니면 투쟁하든가 하는거요. 투쟁하지 않아도 되는 것, 그것이 잘 사는 사람의 첫 번째 사치라고 할 수 있을 거요…』
『투사! 그 못된 정치가들이 가엾은 사람들의 비참한 조건을 이용하는 것이오. 』
『그들도 이용하고 있지요. 』
『어떻게? 』
『앉으시오』피에르가 계속했다.『당신은 틀림없이 좋은 사람일 거요. 그렇지 않으면 벌써 전에 당신을 내쫓고 말았을 거요. 난 지금 아주 피로에 지쳐 있고 내일 아침엔 여섯 시에 일어나야 할 몸이오. 그런데 내 말 좀 들어보시오. 당신 아버지의 약속 건, 그건 대단한 착취라고 생각지 않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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