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와 같이 올해도 그리스도안에 모든 형제들에게 전교주일 메시지를 보낸다. 비록 새로운 말이 없다 하더라도 결코 그대로 지나쳐 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전교는 교회의 사활이 달렸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중대하므로 이 날을 맞을때마다 거듭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전교주일이 교회 안 생활에서 중대한 사건이 된 것은 당연하다.
전교주일은 하느님 자신의 명령을 우리 마음에 일깨워 교회 내외에 우리의 복음 전파 의무가 얼마나 위대하고 무거운 것인가를 깨닫게 해 준다.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온 교회 주교 사제 수도자 및 각 신자에 이 전교 소명을 상기시키고 싶다. 비록 방법과 각도가 달라졌어도 공의회 이후 신앙 전파 의무는 오히려 모든 사람을 더욱 재촉한다.
왜냐하면 공의회는 깊은 신학적 통찰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나그네의 길을 가고 있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며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2) 교회는 전 인류를 위한 구원 계회의 표상이며 도구이므로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9) 참다운 크리스챤 정신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그 정신의 근본적 원동력과 전파하려는 본유적 재촉과 그 신앙을 모든 이에게 전달할 본질적 의무를 깨달아야 한다.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1, 2, 6, 28 참고)』고.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이것은 복음 전파 영역을 넓히려고 노력하는, 특히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라는 복된 이름으로 알려진 특수한 기관을 생각케 해 준다.
비교할 수 없는 임무 수행을 위해 성신의 힘으로 채워 주는 사도적 위임을 그들에게 한 번 더 다짐하고 싶다.
그리고 선교에 일생을 바치는 모든 사람과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일하고 고통 받는 모든 이에게 사랑과 감사를 표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말씀을 전파하는 의무나 필요성과는 달리 오늘날엔 활발한 쇄신을 위한 시대의 표징으로 보이는 특수한 환경이 있기 때문이다.『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이미 곡식이 익어서 추수하게 되었다. (요한 4ㆍ35)』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오늘날의 환경은 인간 간의 통교를 도와서 지구는 탐색 개발되고 교통은 빨리지고 예술ㆍ상업ㆍ국제관계는 다른 문화와의 접촉을 증진시키고 실용적으로 세계를 일치시킨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정신적인 힘이 흘러나오고 조화되지 않는 이념이 더 높은 진리로 해결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새롭고 더욱 심각한 갈등을 낳는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모르는가? (교회헌장 9)
새로운 전교시대가 도래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기쁜 소식을 전하는 (로마 10ㆍ15)』사람들 앞에는 편리한 점이 생긴 반면 새로운 어려움도 가로놓여 있다.
선교사들의 용기와 지혜에도 벅찰 만큼 무대는 넓고 일거리는 많다. 그러므로『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마테 4ㆍ19)』고 하신 그리스도의 초대는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더욱 절실하다. 인류의 미래의 방향에 결정적일 수도 있고 청년들이 신앙과 사랑의 특은을 받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는 이 역사적인 순간을 썩어빠진 비평으로 놓치지 말자.
이것은 선교활동이 광범하고 현대적인 말로 표현돼야 한다는 뜻이다. 기초되는 신학적 원칙, 선전, 인원 보충과 훈련, 실질적인 사업의 방법과 조직에도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
이 쇄신은 실제로 이미 인류복음화성성의 지휘 아래 그 문제에 경험과 능력이 있는 사람 사이에 대규모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교회의 선교 소명을 다시 생각해 보니 선교활동의 일반적 방향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되는 개념 즉 전교와 개발문제가 생긴다. 전교는 교회의 사제직을 그 도구로, 교회 자체의 건설을 목표로, 하느님의 영광을 최종 목적으로 삼는 성신의 활동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구원 계획의 계시로서 복음 전파와 하느님 왕국 확장에 목적을 둔 순수한 종교활동을 의미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교리이며 또한 공의회가 확고하게 뒷받침 한 바이다.
개발은 현대 문명과 그것이 주는 도움에 의해 자아를 더욱 인식하고 더욱 높은 문화와 번영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인간들을 인간적으로, 인위적으로, 현세적으로 촉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선교사가 이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11 참고) 이 두 개념의 對比는 상당히 심각하여 우리는 그것들이 상호 배타적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들의 올바른 관계를 세우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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