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미사 선생님이시죠?』
목소리의 주인공은 또랑또랑한 소녀의 음성이었다. 목소리는 맑지만 어딘가 조급한 목소리다.
『네. 그런데 아가씨는 누구예요?』
미사는 되도록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께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어서 일부러 올라왔어요. 저는 인천에 사는 사은애라는 아이예요』
『사은애?』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사태진의 간악한 얼굴이다. 그의 딸인 모양이다. 그가 드디어 딸까지 합세하여 미사에게 공격을 가하려는 모양이다.
공격이라면 무엇을 위한 공격일까.
사태진의 말투로 본다면 예관수로 하여금 주동숙에게서 손을 떼도록 힘을 기울여 달라는 요청은 아닌 모양이다.
사태진의 주장은 예관수로부터 오히려 미사의 손을 떼게 하려는 소위 인간적인 충고를 한다는 식이 아니었던가.
소녀의 정체가 사태진과 관계가 있다는 직감이 떠오르자 자연 미사의 말투는 아까와는 달리 쌀쌀해졌다.
『그래 은애씨가 내가 무슨 용건이라도 있나요?』
『네. 선생님 제 청을 거역하지 말아주세요. 전 꼭 선생님을 뵈어야 해요. 아버지께 들키면 큰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은애의 말투는 다급했다. 그녀 역시 사태진의 눈을 피하고 있음이 명백하자 불현듯 이쪽 마음도 급해졌다.
『그럼 곧 이리로 오지』
『선생님 거기가 어딘지 몰라요. 저는 서울역 앞 공중전화 속에 있는데요.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아버지한테 들킬 것만 같아서 조마조마해 죽겠어요』
『그럼 내가 곧 데리러 가지. 서울역 지하도를 지나면 남대문 경찰서가 있어. 큰 건물이니 곧 찾을 수가 있을거야 그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곧 갈께.』
미사는 집에서도 슬랙스를 입고 지내는 터라 문제가 없었다. 집에서 입던 옷 위에 코우트만 걸치고 곧 집을 나섰다.
어쩐지 유괴 직전의 소녀를 구출하러 가는듯한 이상한 정의감과 긴장감이 느껴졌다.
택시가 급속도로 남대문서 앞으로 가자 그곳 기둥에 몸을 숨기는 것처럼 서있는 소녀가 보였다.
『은애!』
미사가 소리치고 손짓하자 소녀는 공처럼 층계를 뛰어내려와 택시에 올라탔다.
차속에서도 은애는 연방 뒷쪽으로 신경을 쓰는 것이 미행자를 꺼리는 눈치였다.
『은애 이젠 안심해요. 아무도 뒤따라오진 않으니까』
은애는 여학생 교복을 입은 몹시 창백한 소녀다.
『중학생인가?』
미사는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자연스럽게 물었다.
『아뇨. 고등학교예요』
고등학생으로는 너무도 빈약한 몸집이다. 총기는 남유달리 투명한 대신 영양실조라도 걸려있는 듯 하다.
『학굔 결석했겠네 그럼?』
『아뇨. 전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학교는 야간이에요.』
『오 그래서 너무 과로하는구먼. 너무 무리해선 안되는데』
『아니에요. 선생님. 직장에서도 모두 잘 대해주시고 별로 일도 없어요. 학교도 재미있구요. 전 아버지 때문에…』
소녀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또 한 차례 겁먹은 아이처럼 뒤를 돌아다보고는
『선생님! 저희 아버질 만나 보셨다죠』
『……』
『아버지께 들었어요 전화번호도 아버지 수첩에서 제가 발견한 거에요. 선생님 어떤 일이 있어도 저희 아버지 말씀을 믿어서는 안돼요. 저희 아버지는 거짓말쟁이에요. 그럴 수 없는 비겁한 분이에요. 아니 저희 아버지는 악마 같은 사람이에요. 아버지는 예 아저씨를 파멸시켰어요. 파멸시키고도 모자라서 이젠 선생님께까지 마수를 뻗치려는 거에요』
예 아저씨란 보나마나 예관수를 가리키는 말인가 보았다.
『은애 진정해요. 아버지를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마. 나한테 마수를 뻗쳤다지만 그런 일은 없어요. 또 설혹 마수를 뻗쳤다 하드라도 그런데 넘어가진 않을테니까 말이야. 알았지?』
『선생님 저는 매일 밤 예 아저씨를 위해 기도를 드리고 있어요. 선생님도 기도해 주세요. 예 아저씨가 우리 아버지 어머니 저까지를 모두 버리시고 부디 아저씨 자신으로 돌아가시라고 기도해주세요.』
미사는 열띄게 기도문이라도 외우고 있는 듯한 소녀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버지 어머니 저까지를 버리시라고 기도해 달라는 은애의 말이 무슨 말인지 선뜻 납득되지가 않았다.
『예 아저씨는 우리 가족 세 사람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셨어요. 왜 우리 아버지같은 사람을 못 버리나요? 왜 우리 어머니를 모르는 채 하시지 못하시나요? 왜 저같은 원수의 딸에게 학비를 주시고 먹을것을 주시고 보살펴 주셔야만 하는겁니까? 왜 자신은 직장을 잃고 건강을 잃고 집까지를 잃으면서 우리에게 몸을 바치셔야만 되는 걸까요 선생님은 그 이유를 아시겠어요? 그러시지 마시라고 일러주세요. 제발!』
『자 은애 내리지.』
미사는 정거한 택시에서 내리는 은애의 손을 잡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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