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사씨쯤 되면 웬만한 소리에는 끄덕없을줄 알았는데 역시 충격은 좀 받은 모양이로군. 하하하』
눈에 띄게 히끗히끗 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유 박사는 옷만은 젊은기분을 내려는듯 연회색에 감색타이를 날라갈 듯이 매고 있었다.
『…충격까진 안받았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오. 태 사장이 어찌나 염려를 하는지…그러고 본다면 미사씨 일 때문에 충격을 받은건 오히려 태 사장인지도 모르겠군요』
『그러실지도 몰라요』
『그만큼 미사씨 존재가 태 사장에게는 비중이 큰 모양이오』
『비중이 크다는게 아니라. 그분 성미로는 당신 부하 직원에게 결핵환자가 생겼다는 것이 견딜수 없는 일이거든요. 환자 자신을 위한 염려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위한…체면 손상…일종의 허영이에요』
미사는 느낀대로 그렇게 말했다.
『어지간히 시니컬하시군. 태 사장의 충격이 그 정도의 평가밖에 받지 못할까…』
『기업주의 선심이란 으례 뻔해요. 고용가치를 그나마 인정할 경우에는 때로 온정 비슷한 선심을 베풀기도 하지만… 그것이 아예 없거나 앞으로 가망이 없어진다고 판단을 내릴때는 가차가 없죠. 당장 길가에 나앉을 경우라도 아랑곳 없어요. 그냥 내쫓고 말테니까요』
『흐음-』
유 박사는 신음소리 같은 한숨을 토해내면서 팔짱을 끼었다.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여성입에서까지 이런 소리가 나오게 됐으니…이봐요. 예 선생, 과연 비정의 세대지요?』
미사는 그제서야 원장실에 있는 것이 유 박사와 자기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유 박사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웬 낯선사나이가 히무죽한 미소를 띠운체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등산을 할 참인지 햇볕에 바랜 등산복에 등산화를 신고 옆에는 록색위에 등산모가 얹혀있다.
사나이의 행색은 어딘가 초라할 지경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자그마만 체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고 빛바랜 행색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첫눈에 확띄는 인상이 아니기에 여지껏 미사의 눈에도 안띄었을 것이다.
은연중 경계하는 눈빛이 되는 미사에게 사나이는 온유한 미소를담은 눈길로 목례를 보냈다.
허락도 없이 남의 말을 듣게된 것을 용서하라는 뜻으로도 보이고 우리는 다같은 처집니다, 하는 뜻이 담긴것도 같은 것이었다.
『두 분 마침 좋은 기회니 인사하세요.』
유 박사는 우선 사나이에게 미사를 소개하고 나서
『이분은 예관수(芮寬洙)씨라고 전에는 xx일보의 해외특파원으로 활약하셨지요. 한미사씨가 신문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라면 예 선생의 기사를 한번쯤은 읽은 기억이 있을거요.』
『어머, 바로 그 예관수 특파원이 이 선생님이셔요? 저도 좀 읽었어요 언젠가는 아프리카 미개지의 탐험기사를 칼라사진과 함께 시리즈로 보내주시기도 했지 않아요?』
『이크 열렬한 팬이 여기에도 있었구먼!』
유 박사의 말에 그는 뒤통수를 두어번 긁적이더니
『그건 벌써 까마득한 옛일입니다』
하고 멋적은듯이 빙그레 웃는다.
『그럼 요즘에는 어디 계셔요?』
예관수의 르뽀기사에 흥미를 느꼈던 만큼 현재 그가 하고있는 일에 갑자기 호기심이 일었던 것이다.
그말에 두 사나이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대답에 궁색을 느낀 모양이었다.
『요즘에는 예 선생도 병가중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의사의 말은 듣지 않고 저렇게 망태만 메고 여행을 즐기고 있는 실정이라오.』
『여행이라기보다 행여자(行旅子)라는 말이 어울릴것 같군요. 허허허』
예관수는 그렇게웃었지만 웃음속에 자학적인 가락이 조금도 섞여있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의아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제서야 미사는 사나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았다.
뼈대가 우람하지 못하고, 햇볕에 많이 탄 까닭에 돋보이질 않아서 그렇지 예관수의 이목구비는 귀골(貴骨)스러웠다.
별로 넓지 않은 이마에 깊은 세개의 주름이 가로 파여 있었지만 성긴 눈썹 밑의 눈은 착하디 착한 사슴의 눈이거나 맑디 맑은 산 속의 샘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단아하게 뻗어내린 코는 높은 기상과 그것에 대한 불같은 의지를 암시하는 것 같다.
노상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이 사람의 입은 그것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호색적인 여자들의 눈길께나 빼앗음직한 정교한 구조로 되어 있었으나 얼굴 전체로서 볼 때는 다소 큰 감이 있어 균형을 깨치고 있다.
결국 그의 얼굴은 모든 인간과 인간의 착함과 인간의 의지와 욕정을 자극하는 육감적인 것들의 범벅같은 것이었다.
그러한 그의 얼굴을 빈약해 보이는 그의 체구가 하나의 기쁨처럼 떠받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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